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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정 Dec 21. 2022

폭설이 내린 날, 회사 앞 곰이 나타났다.

회사란 말이지

지난주 금요일이었다. 폭설이 내렸다. 점심에 동료들과 식사를 하러 밖에 나왔다. 코끝 찡한 추위에 눈살을 찌푸렸다가, 금세 다시 활짝 웃었다.

요 놈을 발견했다.

누굴까? 이른 아침에 회사에 쌓인 눈으로 곰돌이를 만든 사람은?


옆에 동료가 한마디 한다.

"우리 회사 사람은 아닐 거야. 입주사겠지. 이렇게 낭만적인 사람이 우리 회사에 있을 리가 없어."

"시간이 되게 많은 사람인가? 아침에 저걸 만들 여유가 있어?"


속으로 생각했다.

'직장인들이여. 왜 이리 시니컬한가?' 한치의 여유도 없단 말인가!

말은 그리 하고도 다들 느닷없이 나타난 곰이 반가운지 사진을 찰칵 찍는다.

눈코입 삼각형 모양에, 적당히 배도 나왔다. 우연인지, 설정인지 입가에는 단풍잎도 하나 물었다.


누군가 장난스레 만든 곰돌이가, 점심식사를 하러 나가는 사람들 마음에 느낌표를 심었다. 노동과 휴식이 분리되는 점심시간, 짠! 하고 나타난 누군가의 놀이 흔적. 보는 사람 마음도 같이 곰돌이를 만든 냥 즐겁다.


오늘도 곰돌이가 짜잔!하고 나타나길 내심 기대해본다.


휴가철이면 해변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아이들은 플라스틱 삽이나 바가지를 들고,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해변에 다양한 모래성을 진지하게 만들며 즐거워한다. 바로 이것이 '놀이'다.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래성을 만드는 것이 즐거워서 모래성을 만들 뿐이다. 아이가 '놀이'로 즐기던 모래성 만들기를 '노동'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엄마가 아이에게 “모래성 다섯 개를 만들면 밥을 줄게”라고 명령하면 아이의 '놀이'는 그 즉시 '노동'으로 바뀐다. '모래성 만들기'는 이제 '수단'이 되고, 밥 먹기'가 목적이 되었으니 말이다. '모래성 만들기'는 더 이상 아이에게 즐거움을 줄 수 없고, 아이가 마음대로 그만할 수 없는 '노동'이다.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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