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부드럽게 감싸주고 배려해 주는 것은 스스로 그런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사물을 바라볼 줄 알며, 정신적인 아픔을 이해하고 인간적인 취약점을 감싸 주는 것은 참담한 고요 속에서 누군가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는 외로운 시간을 보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삶을 견디는 기쁨, 헤르만 헤세-
아는 만큼 보인다는 건 마음도 마찬가지다. 내가 잘 느낀다면 상대방의 마음도 잘 보인다.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걸 원하는지 보이니 그걸 상대방에게 해준다. 매사 잘 느끼지 못한다면 상대방의 마음에 대해서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관계에 있어 필요한 것과 중요한 것 마저도 쉽게 놓친다.
사람마다 각자의 예민도와 민감함은 다르지만, 한 사람은 정말 높고 한 사람은 정말 낮다면 둘의 관계는 쉽지가 않다. 한 사람은 끊임없이 상대를 위해 무언가 해줄 테고, 안 보이는 사람은 계속 잘 받을 것이다. 하지만 잘 보이는 사람은 언젠가는 마음이 고갈되고 어느 순간 관계를 놓아버릴 수도 있다. 관계란 기울어진 채로는 유지될 수 없으니까.
그때가 되면 상대방은 그간 해준 것들을 왜 안 해주냐며 불만을 쏟아내기도 한다. 나를 잘 알아주더니 왜 안 해주냐면서 상대방의 배려와 노력을 빼앗긴 사람처럼 군다. 자신이 보지 못하고 챙기지 못한 것 따윈 생각조차 안 하고 못할 테니까. 잘 보이는 사람은 그런 상대방의 마음까지 이미 헤아리고 있지만 그마저 닫아버린다. 너무도 지쳤으니까. 더 지속하다가는 자신이 건조해져 부서져버릴 테니까. 더는 자신의 정신이 고갈되는 걸 지켜볼 수 없어 관계를 조금씩 멀리하고 스스로 마음에 물을 주기 시작한다.
아무리 서로의 성격과 민감도가 다르더라도 어느 정도는 시소처럼 왔다 갔다 해야 한다. 그래야 조금 부족하더라도 채워지고 다시 부어주고 채워주며 관계가 유지된다. 하지만 받는 것에만 익숙해지고 주는 것이 당연해지면 기울기가 고착화된다. 그렇게 관계란 시소는 녹이 슨다. 그러다 부서지고 끊어지는 것.
하지만 애초에 너무도 다른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잘 보이는 사람이 감싸주고 안고 가게 되는데, 그러다 끝이 오기 쉽다. 그러지 않으려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늘 상황을 충분히 설명하고 기다려주는 여유가 필요하다. 애정이 남아있다면 가능하지만 마음이 피폐해졌다면 이마저도 어렵다. 이 또한 정성과 에너지가 드는 일이니까
그래서 애초에 나와 어느 정도 맞는 사람, 관계를 편안하게 만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어야 하는 이유다. 처음부터 나에게 맞지 않고 불편한 옷을 골라놓고 힘들어하면 어쩌겠나. 뒤늦게 옷을 수선하고 고치기에는 옷자체가 너무나 낡아버렸다.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서로가 서로에게 맞지 않는 옷일 뿐이다.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오히려 관계가 조금씩 개선될 여지가 있다. 꾸역꾸역 맞추는 것보다는.
이런 관계의 이점도 있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유가 깊어진다.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을 겪다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하게 깨닫게 된다. 이렇게나 다르고 맞지 않는 사람도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런 관계의 괴로움은 고통과 성숙을 동시에 선물한다. 삶이란 깊어져야 하니까. 관계가 너무 무난했다면 알지 못했을 넓이와 깊이를 만들어준다.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넉넉한 크기를 갖게 해 준다.
관계를 통한 마음의 아픔과 고통은 나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된다. 아픈 곳은 다시 쉽게 아파지기도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 쉽게 일어날 힘도 길러준다. 웬만한 일에는 그다지 놀랄 일도 없다는 것을 삶은 이렇게 저렇게도 흘러간다는 것을 알려준다. 다만 이왕이면 나와 마음의 폭과 높이가 얼추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좋다는 걸 깨닫는다. 이제야 나란 사람에 대해 잘 알게 되고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게 된다. 또 나와 다른 사람과는 어떻게 지내야 할지도 터득하게 되며 조금이나마 관계의 자신감을 안겨준달까.
그래, 그러면 되었다. 관계가 때로 삐그덕 대고 깨져버린다 해도 힘들기만 하고 아픈 것만은 아니다. 그렇게 우리는 또 성장해갈테니.
* 매주 일요일, 마음에 관한 글을 씁니다.
아팠고 괴로웠던 순간은 어쩌면 저를 깊어지게 했는지 모릅니다. 겪지 않았으면 좋았을 기억도 결국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덕분에 마음에 관한 책을 읽고 시도해보고 또 시도해봅니다. 그러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담아보고 싶어졌습니다. 저같은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