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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Oct 19. 2022

2. 잠들지 않는 동대문

지루한 천국 독일, 재밌는 지옥 한국


내게는 독일에서 함께 지내는 한국인 친구들이 몇 있는데 우리는 가끔 우스개 소리로 ‘한국은 재밌는 지옥, 독일은 지루한 천국’이라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2013년 독일에 온 지 얼마 안돼 현지 정보에 굶주려있던 나는 종종 인터넷에서 독일에서 지내고 있는 한국인들의 커뮤니티나 블로그를 들락 나락 하곤 했는데 그곳의 반응도 우리의 농담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독일 상점들은 모두 주말에는 운영하지 않는데다 평일에도 저녁이 무르익을 때쯤이면 상점 주인들도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도시 또한 몇몇 주점이나 레스토랑에서 번지는 빛과 소음을 제외하고는 적막에 휩싸인다. 그리고 이것은 나에게 꽤나 큰 충격이었고 주말에 주린 배를 움켜쥐며 울상으로 마른 빵을 집어먹으며 전날 장을 봐 두지 않은 자신을 원망을 하는 날들을 몇 번 겪고 나서야 이 생활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심지어 작은 규모의 독일 도시에는 그 흔한 영화관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금요일 저녁, 강의에서 해방된 독일 학생들은 핫한 클럽을 가기 위해 다른 도시로 버스나 전철을 타고 한 시간 정도 이동하는 것을 전혀 꺼리지 않았다.


재밌는 지옥인 한국은 그 사정이 다르다. 모든 이들이 학교와 직장에서 해방되는 저녁은 상점과 레스토랑이 빛을 발하는 시간이었고, 도시에 퍼지는 간판과 음악소리는 거리의 사람들을 휘청이게 만들었다. 게다가 한국에는 노래방, 피시방, 디브이디 방, 방탈출 방 등 이곳에 없는 ‘방’ 문화가 있다. 뿐만 아니라, 하루에 음식점과 술집 그리고 노래방을 전전하는 n차 문화는 한국인들에게는 꽤나 익숙해서 반주를 곁들여 식사를 하면서도 ‘2차는 어디로 갈까?’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중에야 이 ‘방’ 문화가 자신만의 공간을 갖기 힘든 한국 젊은이들에게 대체공간을 제공한다는 것을 깨닫고나니 어딘가 서글픈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신나게 n차를 즐기며 대학가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시절에는 그저 이 자극적이고 흥분되는 밤공기가 좋기만 했었다.  


그리고 이는 독일인 남편도 익히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남편이 방문한 한국의 첫 도시는 ‘홍익 대학교’였다. 홍대는 인천공항과 공항철도로 이어져 있어 외국인들이 많이 유입되는 도시이다. 또한 당시 학생이었던 우리의 주머니 사정과 맞는 게스트하우스가 많았다. 우리는 그날 친한 친구들과 무리를 지어 한국식 밥집, 일본식 선술집 노래방으로 이어지는 아주 평범한 한국의 저녁을 보냈는데, 이게 남편에게는 충격이었다고 한다. 밤늦은 시간에도 거리를 밝히는 네온사인과 온갖 상점에서 울려 퍼지는 유행가 그리고 도시의 밤에 흠뻑 젖어 자신의 소지품은 물론 자신조차도 놓아버린 후 차가운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거나 길거리 행인들에게 시비를 거는 취객들 따위에 말이다.


산을 내려와 우리는 도시로 향했다. 마을버스를 타고 다시 전철을 타고 이동한 곳은 동대문이었다. 지하철 역을 벗어나니 또다시 매캐한 연기와 함께 고층빌딩이 배경으로 깔렸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차와 사람이 다시 속세에 들어섰다는 것을 실감케 했다. 우리는 고작 몇 분 만에 절을 그리워했지만 경기도 언저리에 위치한 부모님 댁으로 돌아가기는 아쉬웠다. 나는 한국에서 두 시간이 걸리는 통학시간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다닐 때 자취를 하지 않았기에 매일 경기도와 서울을 오가는 삶을 사 년 이상 해왔지만 시간이 그에 익숙해지는 면역을 만들어 줄 수는 있어도 그에 들어가는 수고를 덜어주지는 않았다. 독일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편리함보다는 평온함에 익숙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빠르고 편리하지만 정신없고 어지러운 서울에 가는 것이 유쾌한 일이라기보다는 숙제에 가깝게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이왕 서울에 온 거, 아주 뽕을 뽑자!라는 마음으로 동대문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동대문은 나에게도 낯선 곳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동대문을 부모님이 아닌 친구들과 와 본 것은 어린이와 청소년 사이 그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중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더 이상 엄마가 사주는 옷을 입고 싶지 않았던 나는 당시 매일 함께 다니던 단짝 친구 둘과 함께 동대문으로 향했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패션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었기에 딱히 옷에 대한 의견이나 취향이 없었고다. 몇시간동안 맘에 드는 옷을 찾아 헤메였지만 결국 동대문 옷가게 언니들의 추천을 받은 옷들을 가득 사오고 말았다. 그리고 그 옷들은 한 두 번 입고 난 후 옷장에 처박히게 되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대학교를 다닐 무렵 학교 행사에 필요한 단체복을 사러 가게 되었는데 그때는 수량이 많아 동대문 새벽시장 도매상을 찾아가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신세계를 보았다. 막차도 끊긴 시간이라 대로는 물론 골목에도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동대문 근처로 들어서자 마치 다른 세상에 들어온 듯 한 풍경이 펼쳐졌다. 도매시장은 상인과 손님들로 북적였고 그 주변에는 간이시장과 포장마차가 길게 놓여 있었다. 따뜻한 어묵 국물에 몸을 녹이고 비닐봉지에 쌓인 김밥을 들고서 이곳저곳 구경하는 동안 마주친 손님들과 능숙하게 물건을 진열하고 무심하면서도 전문적으로 물건을 흥정하는 상인들이 주는 인상은 그때로부터 근 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잊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 모습들이 동대문의 전부라고 생각한 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우리가 하루 동안 묵게 된 호텔은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십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도 그 호텔은 동대문의 ‘중앙아시아 거리’와 인접해 있었다. 호텔을 찾아가는 길에서부터 외국인 여행객들이 멍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길을 찾거나 다양한 외국 식당 앞에서 장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남편의 어머님의 모계는 우크라이나에 뿌리를 두고 있어 우리는 종종 우크라이나식 러시아 음식을 먹기도 했고, 독일계 아버님 또한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나신 터라 러시아 음식에 익숙하시다. 중앙아시아 거리를 거닐자 요 며칠 고춧가루와 간장에 절여진 남편의 위가 다시 입맛을 찾은 듯 보였다.


“제인, 저 식당 보여?”

“어… 잠깐만, 찾아보니 우즈베키스탄 음식점이네? 왜 가고 싶어?”

“이것 봐! 여기 샤슬릭, 프러프, 보쉬 그리고 필리미니도 있어!”


우즈베키스탄 식당은 처음이라 그저 멀리 떨어져 핸드폰만 들여다보며 멀뚱멀뚱 서있 던 나와는 달리, 남편은 망설임 없이 식당 앞으로 성큼 걸어갔다. 그리고서는 메뉴판을 바라보며 낯익은 음식 이름들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물론 한글이 아닌 그 아래에 쓰여있는 러시아어를 보면서 말이다. 중앙아시아 쪽 음식은 나라별로 명칭이 조금씩 다르긴 해도 비슷한 음식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아마도 구소련에 속했었거나 그 영향권 내에 있던 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 특히 양꼬치를 큼직하게 썰어 꼬치에 구워낸 ‘샤슬릭’, 고기와 밥을 함께 볶아 낸 ‘프러프’, 소고기와 양배추 등을 넣고 푹 끓인 수프인 ‘보쉬’나 작은 물만두 같은 ‘필리미니’등은 어머니의 밥상에서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우리는 방금 남편이 읽어낸 모든 메뉴를 시킨 후 자리에 앉았다. 평소 대식가도 미식가라고도 할 수 없는 남편이 이렇게 기대감에 차서 음식을 기다리고 있다니! 새삼 독일에서 한국식당에 갈 때마다 흥분해서 모든 음식을 집어삼킬 것처럼 게걸스레 메뉴판을 읽는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음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고향 음식이 그립구나 싶어 귀엽다가도 한국에 온 지 겨우 열흘인데 벌써부터 고향 음식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우습기도 했고 동대문 근처에 이렇게 이색적인 거리가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다.



동대문의 새로운 모습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러시아식 튀김 만두인 ‘블린츠키’를 포장해 다시 길거리로 나섰다. 뱃속도 든든하게 채웠으니 이제 호텔로 천천히 걸어가려던 참이었다. 저녁 열 시가 되자 우리의 눈꺼풀이 내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독일에 있었으면 이제 잠자리에 누워 책을 읽거나 넷플릭스의 새로 나온 영화 목록을 뒤적거리고 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동대문은 심심한 천국의 생활에 맞춰진 우리의 생활리듬과는 달리 이제 막 깨어나려는 듯 보였다. 편의점과 주점 그리고 각 종 ‘방’들의 존재를 알리는 간판은 어두운 밤의 분위기와 대조되어 더 환하게 빛나고 있었고 길거리에는 간판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LED조명에 더욱 짙은 그림자를 갖게 된 사람들이 꽃에 모여든 벌떼처럼 윙윙 거리며 떠돌아다녔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이제 막 만난 젊은이들 그리고 n차를 할 장소를 찾아 휘청거리는 걸음을 이어가는 취객들이 사방으로 모였다 흩어지곤 했다. 그리고 그 뒤로 2014년에 새로 지어진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가 빛나고 있었다. 사방에서 비추는 은은한 조명은 DDP 건물의 육중한 부피와 부드러운 곡선을 도드라져 보이게 만들었는데 이는 낮에 알루미늄 패널이 반사하는 차가운 이미지보다는 편안하게 다가왔다. DDP는 내가 한국에서 산업디자인 공부를 시작하기 바로 직전에 착공에 들어가 다시 대학을 졸업을 하게 될 무렵 완공이 되었다. DDP가 한창 지어질 무렵 당시 과에서 제공하는 건축디자인 수업을 듣던 나는 DDP에 대한 여러 가지 논란도 함께 듣게 되었다. 건축 디자인이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그리고 건축과 그 주변 환경은 어떤 맥락에서 어우러져야 하는지 등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DDP는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현장 답사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외국인 건축가가 과연 그 유명세 만으로 우리나라 특정 도시의 맥락을 잘 이해하는 건축을 할 수 있을까? 급기야 서로 다른 성향의 서울시장 둘에 대한 정치적 또는 정책적 논란으로 DDP는 완공되기 전부터 더욱더 화제가 되었지만, DDP는 그 시끄러운 모든 논란들을 외면하듯 자신의 완성을 향해 묵묵히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내가 처음으로 DDP를 마주하게 된 2022년, DDP는 어느새 대한민국 중심부에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드러내며 서있었고 이제는 동대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나에게 새롭고 이색적인 이 건물은 마치 어릴 적 아빠가 외국 출장을 다녀오실 때 사다주시곤 했던 외국과자 같았다. 선물을 받을 때는 마냥 좋았지만 이내 나의 입맛에는 맞지 않아 이내 몇 가지를 뜯어 맛만 보고는 이제는 기억에서 잊힌 그 과자들 말이다. 이제 더 이상 한국에 살지 않는 나는 그 건물에 대해 깊은 논의를 할 수 있는 자격은 없다. 그곳은 나의 삶의 터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그 주변의 옛 건물들과 상점들이 DDP의 엄청난 존재감에 묻혀 마치 세련된 포장지에 싸인 외국 과자 옆 추억의 한과, 생과자들처럼 조금 더 초라해 보인다는 것 말고는 말이다.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감회들을 곱씹는 사이 DDP의 위와 아래가 분명하지 않은 길은 끝이 났다. 그리고 그때 남편이 나를 불러 세웠다.

“제인! 저게 뭐지? 낮에도 저런 게 있었나?”

블린츠키를 우물거리던 남편의 시선이 머무른 곳에는 반짝이는 노란색 천막이 줄지어 서있었다. 일년에 한번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말고는 야시장을 구경할 수 없는 독일이기에, 우리 둘은 눈을 빛내며 새까만 밤에 별처럼 빛나고 있는 노란색 천막을 향해 뛰어갔다. 노란색 천막의 정체는 밤에 잠시 열었다 새벽에 다시 사라지는 도깨비 시장이었다. 천막과 천막 사이엔 어느새 몰려든 인파에 정말 말 그대로 발디딜 틈이 없이 사람들로 붐볐다. 곳곳에는 흥정을 하거나 옷을 대보고 길거리에서 입어보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매우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지나가다 보니 마스크를 썼음에도 느껴지는 열기에 아직 판데믹이 완전히 가시진 않은 시점이라 조금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남편이 너무나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나 또한 마음이 기뻤다. 남편은 한국을 여행하는 동안 이렇게 열정적인 모습을 보인적이 별로 없었다. 경복궁을 데려갔을 때도 사람들이 다 가는 관광지는 가고 싶지 않다며 매표소 앞에서 발길을 돌렸던 그였다. 신기한 마음에 남편의 등에 찰싹 붙어 인파를 헤쳐나갔다.


“내가 한국에서 기대했던 게 바로 이런 거였어!”

남편의 신나는 얼굴로 구경하던 것은 바로 짝퉁시장이었다. 노란색 천막 안 상가에선 한 점포도 빠짐없이 ‘짝퉁’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에선 짝퉁, 즉 명품을 무단 복제한 상품에 대한 규정이 엄격해 이런 시장이 열릴 수가 없다. 종종 스페인의 바로셀로네타 해변처럼 관광객들이 많은 곳에서는 길거리에 짝퉁 제품들을 파는 상인들을 보긴 하지만 그래 봤자 나이키 운동화를 질 낮게 카피해놓은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아디다스, 나이키 등 대중적인 브랜드는 물론 구찌, 페레가모, 프라다 그리고 샤넬처럼 고급 브랜드를 카피한 제품들도 많이 보였다. 남편은 뼛속까지 실용적인 사람이다. 브랜드가 아무리 좋다 해도 보통 제품보다 열 배 혹은 백배 이상 비싼 가격만큼 질도 백배 이상 좋은 게 아닌데, 짝퉁 제품이어도 질이 비슷하면 괜찮지 않냐고 한다. 하지만 원칙주의자인 나의 생각은 남편과 달랐다. 그러면 질이 좋은 노브랜드를 찾아서 사면되지, 굳이 브랜드 제품을 카피한 것을 살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짝퉁 제품을 사는 것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아니냐, 그럼 그것은 질과 가격을 따져서 한 결정이 아니라 속물주의적 행동이면서 또 브랜드 저작권을 무단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적절한 행동이 아니다는 게 나의 의견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명품 브랜드들이 가격 책정을 터무니없게 높게 하는 것은 소비자를 기만하는 행동이다. 남편이 받아쳤다. 고급 브랜드의 상품이 일반 소비자가 구매하기에 비싼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제품이나 브랜드에는 그들만의 철학이 담겨있다. 소비자는 상품을 구입함과 동시에 브랜드의 이미지를 입는 것이다. 우리는 사방으로 붐비는 노란 천막 안 안 사람들의 물결을 헤쳐나가며 독일어로 실랑이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남편이 어떤 물건도 사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남편이 그럼에도 무언가를 사겠다면 굳이 말리지 않을 것을 그 또한 알고 있었다. 그저 이렇게 숨 쉬듯 토론을 하는 게 우리의 일상이다. 결론은 중요하지 않다. 남편과 십년 가까이 말싸움과 토론사이의 얇은 선을 넘나들면서도 서로 유념하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Es gibt keine absolute Wahrheit.(완전무결한 진실은 없다.)” 물결의 끝이 보이자 우리는 아 재밌었다! 하고 다시 블린츠키가 담긴 비닐봉투를 들고 낄낄거리며 숙소로 발걸음을 향했다. 꺼지지 않는 동대문의 밤거리를 뒤로한 채 말이다.


내가 9년전 사준 배낭을 아직도 피부처럼 매고 다니는 남편과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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