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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Jan 05. 2023

시간과 별의 마음

2022년과 2023년 사이 어딘가에서 보내는 바람

독일에서는 해가 바뀌는 열두 시 자정에 사방에서 불꽃놀이 소리가 들립니다. 친구들과 함께 북적거리며 보냈던 여느 때와는 달리 올해 우리 부부는 단둘이서만 집에서 조용히 새해를 맞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둘이서만 맞는 새해는 사 년 만이었고, 정확히는 셋이 함께 새해를 맞았었습니다. 생일을 앞두고 있던 어느 여름날 남편은 저를 위해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왔습니다. 다섯 형제 중에 유독 가장 약하고 겁이 많았던 녀석이라 ‘치타’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용감하게 자라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지요. 사람은 이름대로 산다고 하지 않습니까? 고양이는 사람이 아니지만, 이름을 불러줄 때마다 그 의미가 어느 정도는 닿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치타는 이후 혼자 산책도 나가는 둥 아주 용감한 묘생을 살았습니다. 문제는 너무 용감했던 나머지 어느 날 산책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달은 치타를 찾아 헤매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고, 반년 동안은 시도 때도 없이 울었습니다. 그 후로도 일 년 동안 치타는 늦은 밤 꿈이라는 창문을 통해 종종 남편과 저를 찾아왔습니다. 어떤 때는 건강한 모습으로 또 어떤 때는 다치고 병든 모습이었습니다. 고양이는 야행성이라 꿈에 자주 나오는 거라며 우스개 소리를 하던 남편도 슬픈 얼굴을 숨기지는 못했습니다. 저도 그저 남편 표정을 따라지었습다.


그리고 사 년이 흘렀습니다. 뒤늦은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어놓고 남편과 저는 각자 다른 방에서 새해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새 다이어리를 감싼 비닐 포장을 뜯고 서랍장을 정리하는 소리가 음악소리 위로 떠올랐다 다시 그 아래로 가라앉고는 했습니다. 한동안 남편의 소리가 들리지 않자 궁금해진 저는 거실에서 나와 남편 방으로 향했습니다. 문득 복도에 걸린 사 년 전 맞춘 퍼즐이 눈에 띄었습니다. 4년 전 남편과 마트에서 장을 보다 크리스마스 행사 코너에서 산 4유로짜리 퍼즐이었습니다. 남편과 제가 저녁에 맞추어 놓고 잠에 들면 치타가 밤새 퍼즐을 헤쳐놓기를 몇 번 반복하니 새해가 찾아왔습니다. 이 정도면 치타도 함께 퍼즐을 맞춘 셈이지요. 남편에게 퍼즐에 대한 추억을 재잘거리니 그도 따라 웃습니다. 그렇게 함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사방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시간이 약이라던 가요, 2023년 새해엔 우리는 더 이상 치타를 생각하며 울지 않았습니다.




화성에 탐사선을 보내고 우주에 망원경을 띄우는 지금까지도 시간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과학자는 없다고 합니다. 시간에 대해 고민했던 아인슈타인도 시간이 상대적으로 흐른다는 것은 말할 수 있었어도 시간이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시간은 사람들 사이를 날아다니고 기어 다니고 또 사람에게 약이 되었다가도 독이 되곤 하나 봅니다.


저에게도 지난 한 해 시간은 요술을 부렸습니다.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남편 가족 중 세 명이 유방암 확진을 받았습니다. 그중 한 분은 시어머니였습니다. 다행히도 모두 초기에 발견해 무사히 수술을 받고 이제는 안정적으로 회복기에 들어섰지만, 항암치료를 위해 삭발을 한 어머님을 본 남편의 표정은 지금까지도 시간이 멈춘 듯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하지만 더 잊히지 않는 것은 수술을 받으러 병원으로 들어가시던 어머님의 표정이었습니다. 생전 처음 받는 수술을 앞두고도 어머님은 용감한 얼굴을 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수술받는 자신의 안위보다 오히려 자식들이 걱정할 것을 더욱 두려워하셨던 것 같습니다. 길었던 겨울이 지나고 봄꽃이 하나둘씩 피기 시작하자 어머님은 회복기에 들어섰고 녹음이 짙어지기 전 저와 남편은 삼 년 만에 한국에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부모님을 뵈는 것은 늘 가슴이 아픈 일입니다. 함께하지 못한 부재의 시간이 부채로 다가왔습니다. 한 여름엔 독일에서 함께 지내던 친구 부부가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외국인 남편과 함께 한다는 것은 반대로 수많은 이별을 뜻합니다.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 독일에 살며 이제는 이별에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오만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습니다. 함께한 시간이 길고 마음이 깊을수록 마음의 남는 빈자리는 더 크게 느껴지는 듯합니다.


뜻깊은 시간도 많았습니다. 시어머님 수술을 앞두고 우리는 남편 부모님과 짧게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신나게 눈썰매를 타시는 시아버님과 산장 레스토랑에서 여러 맥주를 흥미롭게 구경하시던 시어머님을 생각하면 아직도 미소가 지어집니다. 재작년 사놓은 독일어 책들 중 반 이상을 읽기도 했습니다. 두꺼운 책과 몇 달을 씨름하다 마침내 마지막 장을 넘기고 책장을 닫을 때에는 뿌듯함이 배꼽 근처에서 따듯하게 올라옵니다. 지난해에는 판데믹 상황이 나아진 만큼 국경의 문턱도 낮아졌습니다. 오랜 시간 집에서 홀로 열심히 연습한 요가 동작을 스페인에서 햇살을 맞으며 할 때는 감격스럽기까지 했습니다. 특히 남편과 함께 많은 여행을 다니며 만든 소중한 추억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래나 저래나 저의 시간은 한 방향으로 착실히 흘렀습니다. 매번 수행과 성취가 궤를 같이 하지는 않았지만 인과관계는 명확하니까요. 그러나 지난해 세계의 시간은 제 것과는 반대로 흐르는 듯 느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미국의 낙태 법 폐지는 ‘로 대 웨이드’ 판결과 이란의 히잡시위는 70년대 미니스커트 단속과 10.29 참사는 세월호 참사와 매우 닮아 마치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 듯 보이기까지 합니다. 1970년의 노마*가 우연히 타임머신을 타고 2022년으로 날아와 미국 뉴스를 보았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 기계 고장 난 거 아니에요?”


진실과 거짓을 알 수 없는 뉴스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저는 올해 마지막 책으로 브라이언 그린(brian Greene)의 [엔드 오브 타임(Bis zum Ende der Zeit)]을 꺼내어 읽었습니다. 몇 주 전 인터넷으로 사놓고는, 막상 배송 온 책이 너무 두꺼워 겁이 나서 책장 구석에 유배해 두었던 책이었습니다. 그런 책을 꺼내 읽게 한 것을 보니 뉴스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사실 이 책을 산 것은 서문에 실린 한 글귀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어 책이 없어 독일어 문장을 임의로 번역해 보았습니다. 전문 번역자가 아니라 정확하지는 않아도 의미가 전달되었으면 합니다.    


“Ich wollte zu Erkenntnissen gelangen, die so grundsätzlicher Natur sind, dass sie sich niemals ändern. Möge Regierungung gewählt und abgewählt werden, möge die World Series immer wieder neue Sieger und Verlierer haben, mägen die Legenden der Leinwand und der Bühne kommen und gehen. (나는 자연과 가까워 다시는 번복될 수 없는 진리에 닿고 싶었다. 한 정부가 선출되거나 퇴출되던지, 월드시리즈에서 매번 새로운 승자가 패자가 나오던지, 전설이라고 불리는 스타들이 스크린과 무대 위에 등장하고 다시 물러가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번복할 수 없는 진리 즉 우주의 모든 현상을 증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식을 찾아 헤매는 물리학자인 저자가 자신이 수학과 물리에 매료된 계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쉽게 풀어쓴 대중서라 해도 과학 문외한인 저에게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책이었습니다. 글을 쓰는 지금도 여전히 책 중앙에 빨간 책갈피를 물은 채로 책상 위에서 저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며칠 이 책과 씨름을 하자 뉴스들이 작게 느껴졌습니다. 우주 차원에서는 인간 사이의 분쟁 그리고 나라와 문화의 흥망성쇠는 아주 짧고 또 작게만 보이기 마련이니까요. 그 후론 머릿속을 어지럽게 하는 스캔들, 특종, 논란 등 자극적인 뉴스들과 단어들 보다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제 주의를 끌었습니다. 자신의 건강과 삶을 희생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의료진들, 연고도 없는 전쟁 피해자들에게 대가 없는 도움을 주는 사람들, 또 진실을 위해 위험도 무릅쓰지 않는 용감한 사람들의 이야기들 말입니다. 평범하지만 우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 모두는 멋대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서로 길을 잃지 않고 사는가 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별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님은 2022년 어떤 시간을 보내셨나요. 견뎌야 하는 시간이 더 많았나요, 아니면 시간이 멈추어주었으면 싶을 정도로 행복한 시간이 더 많았나요? 어떤 대답을 떠올리셨든, 올해는 후자가 조금 더 많으셨기를 바랍니다. 전자를 떠올리신 분에겐 제가 가장 좋아하는 라틴어 문구를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per aspera ad astra’, 독일어로는 ‘Durch Schwierigkeiten zu den Sternen’, 한국어로는 ‘역경을 통해 별까지’라는 뜻입니다.





2022년 마지막 그림, vivaJain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 1973년 미국 연방 대법원 판결로, 낙태의 권리가 미국 헌법에 기초한 ‘사생활의 권리’에 포함되어 사실상 여성의 낙태를 법적으로 허용한 사례이다. 여기서 Roe는 노마 맥보비의 가명으로 한국어 ‘아무개’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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