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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Nov 04. 2020

첫 번째 브런치 북을 발간하며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들

안녕하세요. 비바 제인입니다.

저번 주 토요일, 저의 첫 브런치 북 '독일, 이방인으로 다시 서기'가 발간되었습니다.



지난 오월 어느 늦은 저녁, 저와 남편은 식사 중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지난 이야기들을 잘 기억해?"

"음...  그런 것은 아니야. 주로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것들은 잘 기억에 남는 거 아닐까? 그 시절이 나한테는 좀 인상 깊게 남았어.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랬나 싶은 것들도 있고."

"너는 책 보는 것도 좋아하니까, 한번 글 써보는 것은 어때?"

"생각은 해봤는데... 뭐 글은 아무나 쓰나 싶기도 하고, 근데 어릴 적부터 막연하게 갖고 있던 꿈은 있어. 언젠가 내 책을 내는 거야"




대화는 그 후로 디지털 출판, 책은 언가는 사라질 것인가, 요즘 아이들이 책을 안 읽는 이유 등 사방으로 주제 없이 흘러갔었습니다. 직접 글을 쓴다는 생각은 당시 터무니없는 공상같이 느껴졌습니다. 더군다나 살면서 진지하게 써본 글은 대학원 논문 딱 한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우연히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많은 사용자들에게 사랑받는 플랫폼이었지만, 모든 것이 천천히 변하는 독일에서 살다 보면 한국에서 유행하거나 유명하다는 것들을 종종 놓치고는 합니다.


작가 신청을 하기 위해 늘 머릿속에만 담고 있던 것들을 다이어리에 옮겨 담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야깃거리들은 틈이 날 때마다 제멋대로 머릿속 안에서 재생되곤 했습니다. 장을 보고 나올 때나, 산책을 할 때 혹은 쓰레기를 버리고 올 때 등 말이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잘거리던 목소리들이 점차 작아지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익숙해진 독일의 생활은 지나간 일들을 많이 잊히게 했고, 예전 같았으면 몇 날 며칠 고민했을 일들이 이제는 더 이상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게 되었지요. 목소리들이 모두 잊히기 전에 남아있던 기억의 파편들을 단어로 또는 문장으로 적어야 했습니다.


아니 그런 것이 없겠지만, 시작은 늘 낯설었습니다.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서 길게는 일주일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또는 이미 색이 바래버린 추억을 떠올리기 위해 예전 사진들을 몇 시간씩 바라보기도 했었지요. 많은 작가들이 당부하듯 당시에 남겨놓은 메모 한 장, 사진 한 장이 글을 쓰는 데 아주 훌륭한 재료가 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써 놓은 글을 처음부터 읽어보면서 중구난방 흩어진 이야기들에 좌절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머릿속 목소리와 손을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된 어휘와 낱말들이 조화를 이룰 때면, 이것이 글을 쓰는 재미인 건가 하고 홀로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두어 달이 이어지고, 처음으로 제 이야기를 한 번에 묶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만으로 대가에 대한 기대 없이 뿌듯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2012년 겨울에서 시작된 지난 저의 이야기들은 2013년 늦여름에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2012년을 여러분은 기억하시나요? 당시에 저는 학생과 직장인의 중간에 서있던 사회 초년생이었습니다. 12년간의 공교육을 마치고 4년간의 대학교육을 받고 있는 대한민국의 한 여성이었습니다. 사회라는 세상에 나가기 전 여러 기업에서 사회 경험을 하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사회라는 곳은 참 이상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옷은 어떻게 입고 다녀야 하는지, 어떤 상황에서는 웃고 어떤 상황서는 화를 내야 하는지 모두 새로 배워야 했습니다. 어린이, 학생으로서 배워왔던 세상은 어른이 사는 세상과는 사뭇 달랐지요. 몇 푼 안 되던 인턴 시절 첫 월급의 대부분은 새로운 옷을 사는데 써야 했습니다. 학생처럼 옷을 입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월급으로는 화장품을 바꾸는데 써야 했습니다. 왠지 모르지만 화장이 잘 된 날은 다른 사람들이 저를 더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 같았거든요. 다른 날의 월급들은 절반은 먹고 마시는데 썼던 것 같습니다. 부족한 수면 때문에 바닥이 난 체력과 스트레스가 주는 허기를 무작정 채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2012년 마음이 펑하고 터져버린 제가 그 자리게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무언가를 쫓고 있는데 또 쫓기는 기분이 들고, 앞으로 나아갈수록 마음은 더욱더 공허해져만 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독일로 떠나게 됩니다. 그 뒤의 6개월 동안의 이야기가 브런치 북에 담기게 되었습니다.


독일에서 6개월을 지내다 다시 한국으로 오니 한국은 더 이상 제가 알던 한국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것을 바라보는 제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무표정한 거리의 사람들이 낯설어 보였고, 건물들 유독 높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은 왠지 조금 더 흐린 것 같았습니다. 인턴쉽과 교환학생으로 인해 일 년 반 만에 돌아오게 된 학교 또한 달라져있었습니다.  2013년 말에는 대학가에 대자보가 붙여지기 시작했습니다. 고려대에서 시작되었던 대자보 물결은 저희 학교에도 얼마 되지 않아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학생회관 앞에 붙여진 대자보에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말이 저의 눈길을 붙잡았습니다. 2014년 4월에는 세월호가 침몰하였습니다. 당시 저보다 대여섯 살 어린 학생들이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2014년을 끝맺음하며 교수 협회에서는 '지록위마'라는 사자성어를 남겼습니다.


2013년과 2014년 그 사이를 바쁘게 뛰어가다 보니 어느새 저에게는 졸업예정자라는 꼬리표가 달리게 되었습니다. 졸업예정자라는 이 합성어가 우리나라에서는 참으로 많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기회와 불안이 공존하는 그 시기에 제 주변의 사람들은 바빠 보였습니다. 신입생 때는 하루를 머다 하고 술독을 비우던 친구들은 이제는 수업이 끝나면 취업 스터디를 간다며 사라지곤 했습니다. 다들 입학 때보다는 조금 더 진지하고 피곤한 얼굴을 하고는 캠퍼스를 유령같이 지나다니곤 했습니다. 익숙하던 한국의 모든 것이 점점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교환학생 시절 우연히 몇 다리 건너 어릴 적 한국에서 독일로 이민을 오게 된 청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건축을 공부하던 그는 졸업 후 무엇을 할 거냐고 묻는 저의 말에, '1년간은 그냥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쉴 거야.'라는 말로 답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당시의 저에게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한국의 대학생들에게는 그런 대답을 듣기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여유를 주면서 앞으로 무엇을 할지 생각해 보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흔히들 얘기하는 'Gap year'입니다. 갭이어는 영국에서 1960년대 시작하였는데, 청소년이나 청년기의 학생들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통은 1년 정도의 시간을 갖는다고 합니다. 영국에서 시작되었기에, 주로 유럽이나 미국의 학생들 사이에서 보통 볼 수 있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어디서 시작되었건, 한국에서는 쉽지 않을 것 같아 보였습니다. 어쩐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그가 부러워졌습니다.  


2014년 가을 몇 달이면 떠날 대학 캠퍼스를 걸으며 저는 자주 독일 생각을 했습니다. 그날은 제가 남자 친구를 보러 독일에 한 달간 다녀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한국으로 돌아오면 늘 그렇게 독일의 '초록색'이 그리웠습니다. 독일의 선선한 여름과 습한 가을은 독일만의 초록색을 만들어 냅니다. 한국에서 찾아볼 수 없는 미묘한 초록색과 그리고 바람 사이에 섞인 이끼와 흙냄새가 저에게는 그리운 독일의 이미지였습니다. 회색빛의 현실이 더 우중충하게 느껴지는 날에는 더욱 독일 생각이 났습니다. 비록 남자 친구가 그곳에 있었지만 인생에 중요한 시점에 한국을 떠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선택이었습니다. 마음을 돌리고 모든 것을 잊고 한국에 남아야지라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이내 제 마음은 다시 독일에 가 있었습니다. 점차 저에게는 한국을 떠나 독일에서 1년간 살겠다는 추상적인 계획이 머릿속에 들어왔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제 계획을 조심스레 말할 때면, 격려하는 이들도 있었고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한다며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2014년 겨울 저는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갭이어'를 갖기 위해 다시 독일로 떠나게 됩니다. 어찌나 서둘렀던지 한국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을 마치자마자 독일로 오는 바람에 저는 대학교 졸업식도 졸업장도 보지 못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2014년 저는 한국을 떠나 독일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새롭게 시작하게 된 독일에서의 생활은 일 년 전과는 또 사뭇 달랐습니다. 독일의 상황도 변해있었고, 저의 신분도 달라졌습니다. 주로 영어로 커뮤니케이션하는 독일의 장기 여행자같은 교환학생에서 독일에서 독일어로 소통을 해야 하는 외국인 아무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게다가 1년 갭이어의 시간 후에는 다시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머릿속에서 다시 생각들이 소용돌이치는 것은, 아마 이 이야기들도 써내려 져 가야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다시 이 '나의 독일 ABC'의 첫 이야기를 오늘 쓰게 되었습니다. 갭이어로 시작한 독일에서 독일에 오게 된 지 4년 3개월 후에 대학원 졸업장을 손에 쥐기까지의 시간들과 그 안의 이야기들을 함께 지켜봐 주세요.


감사합니다.


비바 제인






브런치 북 '독일, 이방인으로 다시 서기' 링크: https://brunch.co.kr/brunchbook/germanyand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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