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상황을 다시 되돌아보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낯설지 않은 동네임이 틀림없었다.
시장 마트, 떡볶이 파는 아저씨,
골목 어귀의 낡은 가로등.
'여기... 우리 동네잖아?'
결혼 전까지 평생을 살았던 곳이었다.
결혼하며 출가한 뒤 최근엔 좀 뜸했지만,
내 기억 속 풍경들이 고스란히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진짜 정자를 구하라는 것인가?
이왕 온 거 목적을 달성해 보자.
이건 조상님들이 주신 기회일 거야.'
젊은 내가 걸어갔던 방향으로 뒤따라갔다.
익숙한 골목 안쪽으로 접어들었다.
저 멀리 내가 보인다.
'저 녀석, 어디 가는 거지? 집은 반대 방향인데...'
골목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 편의점 가서 맥주 좀 사 와. 빨리."
김준영.
20년이 지났는데도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나를 괴롭히던 동네 형.
벽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담배를 피우며 벽에 기댄 준영이 형과, 그 앞에서 잔뜩 기죽어 있는 젊은 나의 모습이 보였다.
"형... 지금 집에 가야 해서..."
"10분이면 되잖아. 왜 이래?"
준영이 형이 젊은 나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협박도 폭력도 아닌, 그저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
젊은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어."
그 순간, 20년 전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맥주를 사 가면 "아, 담배도 사와" 하고,
담배를 사 가면 "돈은 나중에 줄게~"
하며 웃던 얼굴.
거절하지 못하고, 피하지도 못하고,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기만 했던 그 시절.
딱 저 무렵이었던 것 같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무작정 주짓수 도장 문을 두드렸었다.
지금까지도 운동을 계속해왔고,
나는 지금 무적의 주짓수 블랙벨트다.
'본때를 보여주자.'
나는 벽 뒤에서 걸어 나왔다.
"준영이 형! 아니, 준영아!"
준영이 형이 고개를 돌렸다.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누구세요, 아저씨?"
"관희 보내줘라 그냥."
준영이 형의 표정이 굳었다.
"뭐? 이 아저씨가 지금..."
큰 보폭으로 다가온 준영이 형이 내 멱살을 잡으려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손목을 잡아채고, 몸을 낮추고, 체중을 실었다.
슈루룩 촤촤착!
암바 작렬!
... 이게 내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실전은 달랐다.
거침없이 주먹부터 내지르는
준영이 형의 주먹에,
나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당연하다는 듯 얻어맞고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철퍼덕.
쪽팔려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기절한척하자.'
"야 너 이 아저씨 알아?"
"아니 몰라 아까 나한테도 욕했는데
미친 사람인가 봐"
"씨발 안 일어난다. 좆댔어 일단 튀어!
'이 새퀴야 내가 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 타이밍에 일어날 수 없었다.
두 녀석의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