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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kaya Lee Sep 08. 2015

나는 귀리죽같은 사람이 될 거야



'오트밀'이라는 단어는 아주 어렸을 무렵,

동화책을 통해 처음 접했다.


기구한 운명의 고아였던 주인공이, 무시무시한 고아원에서 비참하게 얻어먹던

'오트밀죽'이라는 단어에서였나? 아니면, 조금씩 조금씩 만들기 시작한 한 솥 수프가

마을 전체를 먹일 만큼 커져가면서 할머니가 넣었던 재료들 중 하나가 '오트밀'이었던가...?

오트밀, 오트밀이라. 무슨 맛일까?

맛이 있는걸까, 없는걸까? 어떤 색깔을 띠고 있을까?





코펜하겐을 여행할 때였다.

첫 번째 날은 그저 감탄, 두 번째 날도 그저 또 감탄,

세 번째 날부터는 살며시 으음............

참으로, "깎아 놓은 밤톨같은 도시로구만" 그 이상의 다른 감흥이 더이상 일지 않았다.

너무 예뻐. 너무 정갈해. 너무 깍듯해.

너만의 매력은... 뭐 없는 것 같지는 않지만... 으으으음


그렇게나 동경해왔던 '북유럽 디자인'의 산실이라는 사실도,

1년에 국민 한 사람당 커피빈 수 킬로그램씩을 소비한다던 커피 종주국의 위상도

기대만큼이나, 생각만큼이나 '엄청'나지는 않아서, 나는 조금, 충격이었다.

충분히 각오하고 왔지만 늘 혀를 차게 만드는 높디높은 물가,

어디에서건 굽거나 데워서 내어줄 생각을 도통 않는 차디찬 빵조각,

어디에서건 목을 축일 물 한 컵 찾기가 사막에서 오아시스 찾기 버금가는

찬바람 쌩한............ 삭막함. 無情.





............결국은, 발길 닿는 대로 거리를 걷다가,

한적한 시장으로 접어들었다.
















          눈이 즐거운 건 참 많지
















이제는, 그만 지쳤어, 어서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시장 안을 수 차례 배회하다가

그나마 '온기'를 간직한 음식을 내어주고 있는 듯한 한 작은 가게를 마주하게 되었다.


오트밀이었다. 

 

- 물과 soymilk에 조리한 제철 fresh fruits, dried berries, 구운 헤이즐넛과,

호밀을 조금 가미한 오트밀





십 분 가량 지났나... 회색빛 도자그릇에 담긴 내 음식이 나왔다. 

간간한 소금 간과 톡톡 터지는 블루베리들의 달콤한 조화가 그만이었다. 

게다가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던, 이 꼭 알맞는 온도의 따스함,

부드러움이라니.

엄마가 냄비에 잘 지어준 밥같은 맛이 났다. 


맛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재게 숟가락을 놀렸다. 


차가운 바람에 종일 시달리던 몸에 따뜻한 먹거리가 담뿍 들어가니 살 것 같았다. 

그악스럽게 눈에 들어오는 과일들을 골라 퍼 먹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릇 아래 부분의

'곤죽같은' 오트밀 조리한 것을 한 숟가락 한 숟가락 음미하며 떠먹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어쩌면

이렇게

슴슴하고

따뜻할까




오트밀의 '오트'는 곡식 귀리를 뜻하는 단어다.

귀리를 찌거나 볶은 후 가공하여, 조리해 먹기 좋도록 제품화한 것이 바로 이 오트oat 밀meal.

동화 속 주인공들의 힘겨운 인생을 대변하던 '귀리죽'이 이제는 건강식으로까지

각광받는 시대가 되었으니, 역시나 세상사는 차암 모를 일이다. 


............이런 '오트밀같은'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다.

선명한 진보랏빛 블루베리처럼 눈에 확- 들어오면서 톡톡 튀는 제 개성을 내보이는 사람들.

블루베리처럼 반들반들 시선을 사로잡는 사람들도. 

그러나 어쩌다가 조금 다른 곳을 볼라치면, 조용히, 묵묵히,

한결같이 든든하게 누군가의 몫까지를 채워주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위로의 맛을 자신 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

관대하고, 고소한 맛이 있으며, 경박하지 않으면서 위트 있는 사람들. 

티 내지 않으면서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감싸안고,

힘을 낼 수 있도록 북돋아주는 온화함을 제 속에 켜켜이 간직한 그런 사람들이.






나는 흡사 귀리같은, 쌀알같은 사람이 될 거야.

아니, 그렇게 귀리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따뜻한 한 그릇 귀리죽같은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긍정의 에너지를

건네줄 수 있는 마음가짐이란,

얼마나 어른스럽고 자못, 진지한 일일까. 



알곡들이 제 몸에서 나는 기운으로

끈끈하게 엉겨붙어

흐뭇한 친밀감으로 의기소침한 여행자를

달래주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제는 푸석하고 정나미 없는 빵에 버터 발라 먹는 일정일랑 집어치우고

내 사람들의 온기 품은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그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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