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내 상처의 이해 - 상처의 고유함
심리상담은 스스로의 내면을 성찰하는 작업이라서 가끔 이런 억울함이 올라온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고, 순진하게 주변에 해를 끼치거나, 이기적인 사기꾼 같은 인간도 많다. 회사에도 고쳐야 할 문제들이 산더미 같다. 나에게 괴로움을 준 사람이 가진 문제점에 대해서 말하자면 2박 3일도 모자라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내 문제점만 들여다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참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지 않은가? 이건 내 문제가 아니라 정말 객관적으로 누가 겪어도 힘든 일이지 않을까?
우리가 내면을 성찰하는 이유는 나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바꿀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내 삶에 대한 더 많은 통제권을 확보하고, 괴로움을 성장의 밑거름으로 쓰기 위함이다. 하지만 때로는 나도 답답하다. 이 내담자의 부모님이 조금만 더 포용적일 순 없을까, 애인이 더 다정할 순 없을까, 직장상사가 조금만 덜 비난한다면 참 좋을 텐데…. 너무하다 싶은 주변 환경 속에서 또다시 내담자의 마음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발걸음이 미안함에 머뭇거린다.
그래도 역시 내가 겪은 일이 상처받아 마땅한 일이라는 것을 확인받을 때 마음에 찾아오는 위로는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지닌다. 나와 비슷한 상황을 겪는 사람을 티비에서 볼 때, 내 이야기를 듣고 너무 힘들었겠다고 공감해 주는 친구를 만날 때, 나와 같은 팀에서 같은 팀장님으로부터 고통받는 동료와의 속 시원한 뒷담화를 나눌 때. 우리는 내면을 성찰하는 일 못지않게 ‘보편성이 주는 위로’를 구할 필요도 있다. 너와 내가 같은 마음이라는 것. 공감이 아닌 동감이 주는 위로가 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자 실존주의적 저서들로 유명한 어빈 얄롬은 집단 심리치료를 연구하며, 집단으로 함께 치료할 때 사람들이 느끼는 ‘보편성’이 치유적인 요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심리상담은 1:1로 진행하는 개인상담과 8명 정도의 그룹으로 진행하는 집단상담으로 나눌 수 있다. 집단상담은 아직까지 한국에서 대중적이지는 않아서 막상 찾아가 보면 전부 심리학 관련 전공자들이 수련을 목적으로 모여있기는 하다. 하지만 몇몇 유명한 심리상담의 대가라 불리는 교수님들은 수십 년씩 집단상담을 꾸준히 진행하신다. 그런 집단은 높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수련생들에게 인기가 너무 많아서 신청조차 쉽지 않다. 연륜 가득한 교수님과 여러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치유의 효과는 혼자 상담자를 만날 때와 차원이 다른 에너지를 만들기에 어렵게 며칠씩 시간을 내어 경험하러 오는 것이다.
보편성이 동감이 주는 위로라면, 내 상처의 고유함을 찾아가는 개인상담은 공감이 주는 위로가 있다. 깊은 공감은 어떤 마음을 그저 알아주는 것에서 더 나아가 뿌리 깊은 이해로부터 시작된다.
직장에서 비난하는 고약한 상사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을 때, 상사의 고약함과 조직의 위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출근하는 수많은 직장인들, 이상한 사람들 속에서 멘탈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이 느끼는 보편성의 위로는 동감이 주는 것이다. 반면 깊은 이해와 깊은 공감을 통한 위로는 내 삶의 이야기 속으로 향한다.
고약한 상사가 쏟아내는 비난에서 떠오르는 내 삶의 인물들이 있을 것이다. 이 세상 언니들은 왜 그렇게 여동생에게 높은 기준을 가지고 비난을 쏟아내는지, 언니의 비난에 트라우마를 겪는 여동생들이 참 많다. 그런 경우 언니의 말을 조금이라도 거역하면 더 큰 비난과 분노가 쏟아졌던 기억 때문에 비난의 말 하나하나 귀담아 새겨듣는다. 그 말들에 어떻게든 나를 꾸겨 맞추려는 노력이 본능적으로 발휘된다. 비난을 한 귀로 듣고 반대쪽으로 털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말 하나하나를 지키기 위해 애쓰고, 새겨들으며 더욱 상처 입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상담했던 어떤 분은 상사가 하는 모든 지적들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회의 때마다 등에 땀을 흘리며 속기하듯 받아 적곤 했다. 상담할 때면 상사가 어떤 말들을 했는지 억양까지 자세히도 외워서 마치 내가 그 상사를 만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분도 언니와의 관계에서 모진 말들을 흡수하며 자라왔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누군가 쏟아내는 비난이 굉장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감정을 마주했고, 사실 언니의 비난도, 직장 상사의 지적도,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로 두고 살 필요가 없음을 깨우쳐 갔다. 과거에는 착한 막내의 역할로서 생존해야 했기에 언니의 비난이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이제 상사의 지적 중에는 유용한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으며, 착한 막내 캐릭터를 회사에서 유지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대신에 내 직무에 대한 나의 책임감과 고민으로 중요한 것의 기준을 세우는 일에 집중했다.
누군가 비난의 말들을 잘 흡수한다면, 그 사람의 삶 어느 시점에서는 비난하는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비난을 흡수하고서라도 가까운 거리를 지켜야 했던 누군가 있었던 것이다. 평생 언니의 비난을 들으며 언니의 기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집에서 눈치 보며 지내야 했던 사람이 직장에서 또다시 혹독한 비난을 매일 마주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까? 평생 매 맞아 피멍이 들고 맷집으로 무감각해진 곳을 또 맞는 지겹고도 두려운 기분일 것이다. 많이 다쳤던 자리는 쉽게 아물지 않아 건드리기만 해도 아프다. 사람들에겐 누구나 그런 자리가 하나씩 있다.
마음의 상처엔 보편적인 면도 있지만 개인적이고 고유한 면도 존재한다. 마음의 상처란 욕구의 좌절이라고 얘기했는데, 사람마다 같은 종류의 욕구를 같은 양만큼 갈망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각자의 고유한 욕구들이 있다. 상처의 고유한 면을 찾아가면 고유한 욕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고유한 욕구는 내 삶에서 무엇이 결핍되었는지 알려준다. 사람은 언제나 결핍된 것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주변 환경이 너무 스트레스가 많고, 누가 이 자리에 와도 힘든 일이라는 것이 분명할 수 있다. 주변 상황이 말도 안 되게 부당할 수도 있고, 진짜 악독한 사람한테 잘못 걸린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성의 위로를 건너서 고유함을 탐색해 보는 이유는, 나는 이 세상에 그것만큼 근본적인 치유는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내면성찰만큼 삶에 통제력을 선물하고, 반대로 환경에 영향을 미치고, 내 삶의 환경을 구성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방법을 나는 사람들의 내면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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