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내 상처의 이해
스물여덟 살의 어느 날, 나는 스쿠버 다이빙을 마치고 필리핀의 어느 섬 바닷가에 누워있었다. 아름다운 바다, 맛있는 음식, 재미난 이야기들. 서울에는 힘들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직장이 있었고,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다. 그런데 문득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섬뜩한 느낌이었다. 불쑥 튀어나온 마음에 되려 내가 더 놀라서 식은땀이 흘렀다. 더할 나위 없던 그 순간에. 내 삶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걸까?
불만족스러운 10대를 꾸역꾸역 살아내고 나니 20대는 나름대로 즐거운 일들이 많았다. 뭔가를 성취해 내는 즐거움도 있었고, 연애도 하고, 친구들과 술도 실컷 마시고, 돈도 벌고. 한창 나만의 색깔을 갈망하던 시기여서 취향과 취미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찾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불쑥 찾아온 그 마음은 허무함이었다. 어릴 적에 산 위에 구름이 걸쳐 있는 것이 너무 신비로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빠는 우리가 그 속에 들어갈 거라고 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굽이굽이 올라간 산 정상은 너무 춥고 안개가 가득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20대 후반에 느낀 감정이 딱 그랬던 것이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구름 속에 들어가기를 기대했지만 막상 도착한 곳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헤맨 20대. 나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라고 말한다. 좋아한다거나 행복하다는 것, 그 단어가 주는 느낌은 경쾌하지만 즐거움으로 향하는 길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좋아하는 일, 내가 진짜로 원하는 삶을 발견할 수 있는 방향은 불쾌와 불편, 분노와 불안이 가리키는 곳이었다.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곳을 향해 발을 내딛을 때 진솔한 자신을 마주할 수 있다. 편안하고 즐거운 쾌락을 따라가며 외면하게 되는 불쾌한 곳에 내 삶의 중요한 주제가 숨어 있다.
불쾌한 감정은 누구나 빨리 떨쳐 내고 싶다. 그중에서도 '분노'라는 감정은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전혀 관계없는 사람과의 마찰이라면 확 화를 내 버려도 지나가면 그만이겠지만 가까운 사람이라면 그렇지 못하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힘이 센 사람 앞에서 분노조절장애가 치료되었다는 우스운 농담처럼 우리는 화를 참다가도 어떤 곳에서 터져버린다. 화를 내선 안된다고 여기는 장소나 대상도 사람마다 달라서 밖에서 참다가 안에서 터지는 사람도 있고, 안에서 참다가 밖에서 터지는 사람도 있다.
직장을 다니며 심리상담을 받으면 처음엔 굉장히 낯설다. 직장에서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적이기 위해 노력하는데 상담소에만 가면 계속 감정 얘기를 하니 말이다. 분노를 아주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억압하는 사람은 화가 나는 에피소드를 이야기할 때도 이런 식으로 억누르며 마무리를 한다. "이번 일로 당연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제가 화 낼 일은 아니니까 어떻게 보면 감정낭비죠. 생각하지 않으려고요. 이제 괜찮아요."
이렇게 찰나에 스쳐가는 억눌린 분노를 캐치해서 그 감정에서 머무를 수 있도록 잡아두는 것이 상담사의 기술이다. 억압된 감정은 곳곳에 숨겨져 있는데 그것을 끄집어내어 충분히 느끼고 감정이 흘러가서 해소된다고 느낄 때까지 머무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작업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상담을 받는 내담자는 혼자 있을 때도 자신의 분노를 캐치할 수 있고 스스로에게 필요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다.
상담사가 분노의 불씨를 되살리려고 애쓰는 이유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분노는 아무 데서나 튀어나오지 않고 중요한 것을 지킬 때 타오른다. 다시 말해 분노가 타오르는 곳에 당신이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무엇인가가 담겨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즐겁고 쾌락적인 마음이나 이성적으로 성찰해 보려는 차가운 마음으로는 당신의 깊은 무의식에 도달할 수 없다.
분노는 소중한 것을 지킨다. 어떤 연예인이 무례한 사람에게 '선 넘네'라는 말을 했다. 세상에는 참 많은 범죄와 무례함과 불쾌한 일들이 나타난다. 그중에서 나에게 유독 누구도 넘어오지 않았으면 하는 '선'이 있다. 그리고 그 선을 넘어오는 이들을 위협해서 다시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분노이다.
적절한 분노는 타인과의 거리를 조절해 준다. 미친 듯이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약간의 불쾌를 표현함으로써 선을 긋는다. 그 표현은 정중한 거절일 수도 있고, 무표정이나 무응답으로 화제를 돌리는 방식일 수도 있다. 분노로 선을 조절하지 못하고 계속 상대방의 요구를 받아주는 사람도 있다. 거절하지 못하고 무표정을 짓지 못하는 사람들. 이들은 타인과의 거리 조절이 어려워서 결국 매번 웃으면서 만났는데 어느 날 연락이 두절된다. 거리조절이 어려우니 아예 단절을 선택하는 것이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분노를 참았겠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하다. 관계는 나와 너 두 사람이 모두 중요하기 때문이다. 너만을 중요하게 여기면 내가 힘들어서 관계가 유지되지 못한다.
심리상담에서는 분노에 초점을 맞추는데 그러다 보면 마치 분노 데이터를 수집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렇게 한 사람이 분노하는 순간들의 데이터를 모아서 패턴을 발견하는데, 분노의 알고리즘을 파악해 보면 그 안에 마음의 상처도 담겨 있고 삶의 중요한 주제들도 담겨 있다.
나는 어느 날 몸이 뜨거워지는 강렬한 분노를 느낀 적이 있다. 내가 평소 별로 좋아하지 않던 사람이라서 당시엔 내가 그 사람을 정말 싫어하는가 보다 생각하고 넘어갔었다. 그때 여러 사람이 모여 얘기를 하다가 언성이 높아졌는데, 그 사람이 나에게 "넌 조용히 해."라고 말했다. 물론 누가 들어도 불쾌할 법한 말이었지만 몇 년이 지난 뒤에도 문득 그 순간이 떠오르곤 했다.
기억에 남는 또 다른 분노는 대학교에서 교수님에게 느낀 것이었다. 강의를 시작해야 할 시간에 사람들이 강의실 앞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우리 강의실에서 원로 교수님이 잠깐 제자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그런데 우리 강의를 담당한 교수님이 강의 시작 시간이 지나도록 앞에서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답답해서 우리가 대신 얘기를 해주겠다고 하는데 교수님은 끝까지 강의실 문을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결국 학과 사무실에 연락을 해서 어떤 조교분이 왔고 드디어 강의실 문이 열렸다. 원로 교수님은 허허 웃으며 수업이 있는 줄 몰랐다며 쿨하게 퇴장하셨고 나는 답답함과 분노가 섞인 뭔지 모를 감정을 느꼈다.
분노 데이터를 모으다 보니 나는 뭔가를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래서 말하지 못하게 하거나 들어주지 않는 권위적인 존재 앞에서 유독 분노가 일렁거렸다. 나는 어릴 때부터 세상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참 많았다. "왜?"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지다가 답을 몰라서 그냥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 척 호기심을 억누른 채 살아왔다. 왜 공부를 할까? 왜 취업을 할까? 왜 아이돌을 좋아할까? 왜 열심히 해야 할까? 뭐든 이유를 알아야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본질을 모른 채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것이 괴롭고 의아했다.
그런 질문을 던지면 뒤따라오는 사람들의 반응도 어린 나이에는 상처였던 것 같다. 독특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친구들 무리에 소속되고픈 욕구가 좌절되어서 나도 그냥 똑같은 생각을 하는 척 하기 시작했다. 남들 눈에 평범해 보이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누구나 살아가듯 살아내려고 대학도 가고, 취업하고, 취미생활도 했지만 막상 아무것도 없는 구름 속에 도착한 것이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향은 자연스럽게 내가 가장 의미 있다고 느끼는 일을 발견하게 해 준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몇 년째 계속 물어보고 있고, 그것은 심리상담에서 누군가의 말을 피상적이 아닌 깊숙하게 들어주는 원동력이 되고, 더 진솔한 글을 쓰는 시간으로 녹아든다. 분노를 떨쳐내는 대신, 수집하고 몇 년씩 소중히 들여다보아야 할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