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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Dec 27. 2024

우리가 숨기고 사는 것들

Part 2. 내 상처의 이해

우리가 숨기고 사는 것들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얼마 전 친구의 인스타그램에서 멋진 여행 사진을 본 기억이 나서 어디를 다녀온 거냐고 물었다. 참 해외를 자주 나가는 것 같다고. 그러자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이야 이거 효과 좋네. 어디 안 갔어. 사실은 전부 몇 년 전에 간 유럽 여행 사진이야. “ 그 말을 듣고 나서 돌이켜보니 나의 인스타그램을 본 또 다른 친구의 말이 생각이 났다. 나는 늘 내가 지독한 집순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보고 참 여기저기 잘 놀러 다니며 재밌게 산다고 했다. ”응? 나 맨날 집에만 있는데? “


우리는 타인의 삶 전체 중에서 아주 작은 한 조각만을 맛볼 수 있다. 그래서 저 사람은 참 열심히 사네, 성공해서 좋겠네, 넉넉한 집에서 태어나 마음 편히 살아왔겠네, 등등 한 조각을 떼어 요리조리 바라보며 부러움을 느낀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나의 삶을 타인에게 괜찮아 보이게끔 편집하는 일이 아주 손쉽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괜찮지 않은 모든 치부들을 숨긴 채 괜찮은 한 조각만 잘 다듬어서 보여주고 나머지는 드러내지 않으면 되니까. 타인에게 드러내는 한 조각의 편집된 모습과 내가 바라보는 나의 전체, 24시간. 그 사이 간극이 커질수록 마음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외모나 여행 사진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겐 ‘감정’ 또한 편집의 대상이 된다. 많은 이들에게서 편집되는 감정은 눈물이지 않을까 싶다. 사람 많은 곳에서 눈물을 흘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심지어 심리상담소에서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죄송하다는 사과를 한다. ‘눈물’과 ‘죄송해요 ‘가 한 세트처럼 거의 동시에 등장한다. 그분들도 이곳이 눈물을 보이면 안 될 장소도 아니고, 슬픔이 잘못이 아니란 것도 머리로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생각조차 하기 전에 깊숙한 곳에서 튀어나오는 본능적인 눈물과 죄송함의 결합이 있는 것 같다.


부정적이거나 나약하다고 여겨지는 감정은 감춘 채 밝게 편집된 모습으로 교류하는 사람들은 타인의 아픔을 보지 못하기에 자신의 아픔을 더 큰 좌절로 겪는다. 작은 공동체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다 보면 나의 정체성을 숨기는 데 한계가 있다. 하지만 옆 집 사람 이름도 모르는 도시에서, 모여 앉아 있어도 각자 스마트폰만 보고 있는 가족과 친구들 속에서는 가까운 관계에서 조차 편집이 가능하다. 보기 좋은 한 조각 이면에는 삶의 다양한 고통들이 그늘져 있다. 늘 밝다고 느꼈던 사람이 집에서 우울증 약을 먹고 있기도 하고, 낮에는 여유로워 보이는 사람이 밤마다 불면증으로 잠 못 이루기도 하며, 성공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깊은 외로움으로 알코올 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명암이 짙어지듯이 화려할수록 어둠도 깊다.




구멍 난 양말을 신은 기분으로 사는 하루


타인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노력이란, 좋지 않은 모습을 숨기는 노력이기도 하다. 들키지 말아야 할 무언가를 숨기며 사람들과 대화해 본 적이 있다면 그 초조함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작은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점점 더 큰 거짓말을 해야 할 수도 있고, 들키고 싶지 않은 주제로 대화가 흘러가는 것을 막느라 화를 낼 수도 있다. 내 약점이 드러날까 상대방을 더 맹렬히 비난하기도 한다. 무언가 숨길 것이 있을 때는 슬픈 결론에 이른다. 바로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된다는 것. 아무리 다정하고 소중한 사람일지라도 내 치부 가까이 다가온다면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가까운 사이가 두려워지고 결국 외로움을 달래주는 술이나 자극적인 음식에 취한다. 순간적인 위로는 받을 수 있지만 삶 전반적으로는 은은하게 불만족스러운 느낌이 풍길 것이다. 혼자만의 안전한 공간을 마련했다고 안도하는 순간 불쑥 찾아오는 공허감을 어떻게 달랠 수 있을까.


심리상담에서는 ‘수치심’이란 감정을 중요하게 다루며 공부한다. 흔히 성희롱의 기준으로 여기는 성적 수치심과는 조금 다르다. 창피하고 낯 뜨거운 느낌이기는 하나, 심리상담에서 수치심은, 자신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하자가 있거나 문제가 있다는 느낌을 이야기한다. 즉 어떤 사건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 아닌, 나의 근본적인 존재 자체가 벌거벗고 드러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수치심을 핵심 감정으로 가진 사람은 무의식 속에 ‘나는 사랑받을 수 없어.‘, ’ 나는 부족한 사람이야.‘ 같은 신념들을 지니고 있다.


수치심을 핵심 감정으로 가진 사람을 주변에서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부족하다는 느낌과 반대로 하자라고 부를 것이 전혀 없이 완벽해 보이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겉으로 보여지는 성격의 깊숙한 내면에는 언제나 그것과 반대되는 역동이 작용하고 있다. 나 자신에게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감추기 위해 아주 좋은 것을 성취해서 수치심을 보상하려고 한다. 심리상담소에서 학업성적이 아주 우수한 친구들을 자주 봐왔는데 그렇게까지 지독하게 공부를 한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를 따라가 보면, 공부를 잘한다는 타이틀을 통해서 뭔가 부족하고 결점이 있는 듯한 느낌을 채우려고 했던 경우가 참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치심은 특별한 능력, 화려한 외모, 높은 성적, 권위와 명예를 얻고자 하는 원동력이 된다.


수치심이란 고통은 특별한 재능으로 꽃 피울 수 있다. 결핍과 고통을 품고 살아낸 삶엔 어떤 선물이 주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특별한 재능이 수치심을 사그라들게 하지는 않는다. 노력으로 빚어낸 화려하고 특별한 자아와 여전히 하자가 있는 것 같고 끝없이 부족한 느낌을 지닌 자아가 상충하며 내면에서 만들어 내는 간극에 ‘도대체 언제까지 더 나아져야 하는 거지?’라는 분노 섞인 질문을 던지는 날이 온다. 사람들을 속이는 기분도 든다. 구멍 난 양말을 신었는데 그 위에 아주 화려한 구두를 신고, 멋진 패션으로 시선을 끌지만, 나의 내면은 여전히 혹시나 누군가 ‘신발을 벗고 너를 보여줘.’ 라며 다가올까 봐 긴장이 감돈다. 사람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약간은 초조한 마음으로, 나의 문제점으로 이야기의 주제가 흘러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신경을 곤두세운다.




드러내야 치유되는 것들


수치심에 관한 TED 강연과 저서로 유명한 브레네 브라운 박사는, 수치심을 치유하려면 드러내야 한다고 말한다. 수치스러운 것을 타인으로부터 숨길수록 마치 세균 배양 접시에 놓인 세균들처럼 기하급수적으로 증식한다. 더 커져버린 수치심은 또다시 회피와 고립을 부추겨서 집착이나 중독과 같은 심리적 문제로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수치심을 느끼는 주제를 숨기는 대신 용기 내어 이야기해야 하며, 그것을 이야기하는 순간 찾아오는 취약해진 느낌이 바로 용기의 척도라고 말한다. 용기 있다는 건 내가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타인 앞에서 취약해지는 만큼 우리는 수치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해방된다.


나도 예전에 모르는 주제로 대화하는 사람들 속에 있을 때면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곤 했다. 특히 정치나 사회 문제, 부동산 등등. 뭔가 내가 성인이라면 마땅히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잘 모르는 주제가 등장할 때면 입을 꾹 닫고 있었다. 내가 잘 아는 주제여야만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심리상담사가 된 후로 깨달은 것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내가 전혀 모르더라도 들어줌으로써 충분히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하나의 스위치만 바꾸면 되는 것이다. 내가 모른다는 것을 숨기는 미션 대신 솔직한 고백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저도 그 주제에 대해 궁금했는데 더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왠지 이 나이쯤 되면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여전히 모르는 게 많네요. “


고백의 스위치를 한 번 켜보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상대방은 나를 무시하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다. 혹여나 무시하거나 놀린다고 해도 괜찮다. 그 사람의 그릇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을 우리가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고백의 스위치를 켜고 나면 비로소 모르는 부분을 스스로가 깨달을 수 있고, 그다음은 자연스레 질문할 수 있고, 검색해 보게 되고, 알게 되며 성장한다. 직장에서도 이 스위치를 켜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는 경우가 참 많다. 수치심을 핵심감정으로 지녔다면 마치 새로운 언어를 배우듯 낯설 수 있기에 혼자서 어렵다면 심리상담소에서 그 첫마디를 떼는 연습을 함께 해볼 수 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했을 때 상대방이 그것도 모르냐며 비아냥 거릴 수도 있고, 반대로 으스대며 아는 척을 할 수도 있다. 그 반응은 그 사람의 인성의 몫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반응과는 별개로 고백하며 취약해지는 경험을 통해 용기를 내었고, 모르는 주제를 오픈했기에 더 이상 숨길 게 없으니 잃을 패도 없다. 남은 건 배우고 성장하는 수순뿐이다.




가장 취약한 모습으로 연결되는 곳


종교가 이끌던 세상을 살아보진 못했지만, 글로나마 접해보면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가치가 꽤나 우위에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세상은 쾌락이 어떤 면에서는 선이 되었고, 삶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었다. 쾌락이 주도하는 삶은 어디든 중독되기가 쉽다. 그리고 중독이란 건 중독되는 대상과는 딱 붙어서 살아가지만, 반대로 어딘가로부터는 단절되는 일이다. 가족과 현실로부터 멀어지는 게임 중독, 알코올 중독, 그리고 소소하게는 쇼츠 중독이나 쇼핑 중독까지.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라는 소설을 읽어보았다면 주인공 김 부장이 이 주제에 아주 적합한 인물이란 걸 알 것이다. 김 부장은 대기업에 다닌다는 자부심에 그에 걸맞은 외제차와 옷차림을 하고 다닌다. 하지만 사실 그는 회사 밖의 세상 사는 일에 대해서는 아주 무지했는데, 애써 그 취약한 영역을 외면하려 애쓴다. 한참 후배인 팀원이 부동산에 대해 빠삭할 때 그것을 비아냥거리며 평가절하한다. 그리고 잘 아는 척 일을 저지르는 바람에 부동산 사기를 당하고야 만다. 그러나 이내 그 모든 실패들을 아내에게 털어놓았을 때, 비로소 아내와 더없이 가까운 사이가 된다. 물론 현실에서는 소설처럼 현명한 아내가 따뜻하게 맞이해주지만은 않겠지만 그럼에도 취약함을 드러냈을 때 대부분의 가깝고 소중한 사람들은 도와주고 싶어 한다. 김 부장이 자신의 취약함을 끝내 숨긴다면 어땠을까? 나 힘들고 창피해.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당신에게 부끄럽고 미안해. 이 말을 하는 대신에 아마도 또 다른 보상을 찾아 도박에 빠지거나, 현실에서 도망쳐 게임이나 술에 취해 역정을 내고 다니지 않았을까.


취약함을 숨기고 단절되는 것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자식에게 약함을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부모님들이 참 많다. 많은 빚이 생기도록 털어놓지 못하거나, 아픈 몸으로 무리해서 일을 하다가 큰 병이 되는 등. 반대로 자식도 역시 부모에게 힘듦을 고백하는 대신에 화를 내는 슬픈 장면이 많다. 힘듦을 고백하는 것이 부모님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며 아무런 효과가 없어서, 이미 많이 해봤지만 상처만 남아서 굳게 닫힌 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나의 새로운 연인, 배우자에게는 취약함을 오픈하는 노력을 기울여 본다면 어떨까? 부모로부터 닫힌 마음은 사실 또 다른 관계에서도 열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우리는 부모님이 책임져주지 않을 나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기에. 그리고 새로운 관계를 통해서 과거의 상처로부터 치유되는 삶을 살 수 있기에. 내가 숨기고 사는 취약함이 무엇인지, 사람들 앞에서 자꾸만 편집하고 이야기하지 않는 주제가 무엇인지, 자연스러운 대화 대신 어색한 대화를 시도해 본다면 내가 알던 나로부터 조금씩 넓어지는 걸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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