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조직문화에 던지는 작은 실험
2년 전, 내게는 낯설지만 인상적인 프로젝트 경험이 있었다. 외국 업체의 주도로 글로벌 업무를 진행하는 프로젝트였고, 상대는 미국 회사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 회사의 팀 구성이었다. 프로젝트 멤버는 미국 전역은 물론, 캐나다와 호주에 흩어져 있었고, 모든 협업은 Zoom을 통해 이루어졌다. 시차도, 물리적 거리도 장벽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 충격은 프로젝트 매니저(PM)의 역할 구조였다. 이 프로젝트의 PM은 정규직 직원이 아니라, 외부에서 채용한 ‘계약직’ 전문가였다. 그 PM은 회의를 주도하고, 일정과 품질을 조율하며, 정규직 팀원들에게 직접 업무 지시와 피드백을 주었다. 한국 조직문화에 익숙한 나로서는 꽤 어색한 장면이었다. ‘계약직이 정규직을 지휘한다고?’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한국 조직에서는 통상 직급과 고용 형태가 위계질서의 기준이 된다. 연공서열 문화와 결합된 이 위계는 업무 효율보다 관계 유지에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외국계 프로젝트에서는 그 기준이 오로지 ‘역할’과 ‘전문성’이었다. 조직 내 지위가 아니라, 프로젝트 성공을 위한 ‘기능적 위치’가 중요한 기준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시스템을 Contractor-led Project Management” 또는 “External Project Leadership”이라고 불렀다.
이 경험은 내게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이 방식, 한국에서도 가능할까?”
나는 현재 두 개 회사의 고문계약을 하고 활동하고 있다.
한 회사에서는 전통적인 고문의 역할을 한다. 즉, C레벨 사사람들과 회의를 하고 그들의 질문에 답해주는 역할정도이고 실지 실무자들과 접점이 별로 없다.
그러나 다른 한 회사에서는 위 실험을 작게나마 적용해 보기로 했다. 외부 PM의 역할을 계약 형태로 수임해 주 1회 출근하며 팀원들의 업무 상황을 점검하고, 내가 맡은 업무의 진행 상황을 투명하게 공유하고 있다. 형태는 계약직이지만, 실질적으로는 PM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다.
정규직과의 차이점은 내가 만일 풀타임 정규직으로 PM 일을 한다면, 나와 관련 없는 회사 내 타 사업도 신경 써야 하고, 회사 내 모든 크고 작은 일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계약직으로서의 나는 맡은 업무 외의 일은 신경 쓰지 않는다. 회사 복도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가 정규직일 때는 내 문제지만, 계약직의 경우는 내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흥미로운 점은 팀원들이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전제는 “인정받을 만큼의 전문성”이다. 내가 이 업계에서 갖춘 경력과 실적이 팀원들에게 신뢰로 작용했고, 그것이 관계의 안정성을 만들었다. 단지 고용 형태가 아니라 ‘신뢰 기반의 수평 구조’가 가능하다는 걸 입증하고 있는 중이다.
이는 특히 ICT, 콘텐츠, 게임, 디자인 같은 ‘유연 노동 시장’에서 유효한 방식일 수 있다. 성과 중심이고, 전문가 기반의 협업이 많으며, 정규직-비정규직의 경계가 느슨한 업종들에서는 새로운 조직 운영 모델로 기능할 수 있다.
물론 아직 일반화하긴 이르다. 한국 사회 전반에 깔린 위계 문화는 여전히 강하다. 하지만 조직의 목적이 ‘성과’라면, 지금 같은 실험은 필요하다. 어쩌면 미래의 일하는 방식은 ‘정규직’이라는 신분보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역할 중심으로 재편될지도 모르겠다.
이미 많은 기업에서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이러한 방식이 결국 실패로 끝날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재미있는 실험이고, 1년 정도 지켜보면서 업무의 아웃풋도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