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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비라이온 Jun 18. 2021

02.사람이 아닌 것들과의 공존

- 일본의 신토(신도 : 神道)와 야오요로즈카미(八百万神) 사상

 일본의 신토(신도 : 神道)는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일종의 생활 종교다. 어찌나 신이 많은지 八百万神(야오요로즈카미 : 팔백만신)라고 말할 정도. 그래서인지 천년 수도였던 교토에는 크고작은 신사, 절 등이 하도 많아서, 하나하나 거론하기도 어렵다. 이런 사상은 체계적인 교리나 종교로서 집대성 되지는 않았지만 일본인의 생활과 생각 속에 깊이 뿌리내린 것이어서 그들의 생활과 문화 속에서 얼마든지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는, "百鬼夜行". 작가는 가와나베 교사이(河鍋暁斎).

 

일본 콘텐츠에 나타난 만물신 사상


 당장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 등 콘텐츠 중에는 만물에 신이 있다는 신토적 사상이 깔려 있는 것들이 많다. 지금 바로 떠오르는 것만 읊어봐도 "이웃집의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 미야자키 하야오의 장편 애니들이 대체로 그렇다. 특히나 "센과 치히로.."는 만물에 서려있는 신과 정령들이 쉬러가는 온천이 주 배경이라 온갖 형상의 신들을 원없이 볼 수 있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때 재밌게 봤던 일본만화 "백귀야행". "백귀야행"은 제목부터가 특정 날의 밤에 신과 요괴와 정령과.. 등등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들이 지나가는데 이 무리와 마주치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일본의 전설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내용인 즉슨, 기담 작가였던 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사람 아닌 것들을 볼 수 있는 주인공이 매 회 다른 요괴나 영들을 마주하여 문제를 풀어주거나.. 하는, 역시나 만물신 사상에 기반을 둔 판타지다.


출처 : 각 배급사, 서적 판매처(알라딘)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시리즈 애니메이션 "요괴워치"도 있다. 좀더 코믹하고 발랄한 터치의 애니메이션 "요괴워치"는 평범한 12살 어린이 민호(한국판 명)가 주인공으로, 평소 주변에 생기는 일상적이지만 이상한 일들(예를 들면 갑자기 딸꾹질이 난다든가,  잠이 안온다든가, 물건의 위치가 바뀌어 있다든가 등등) 사실은 요괴나 정령이 벌이는 일이라는 게 기본 설정이다. 그래서 여담이지만, 매 화 새로운 요괴들이 등장하는데  이렇게 매 회 다른 캐릭터가 자꾸자꾸 등장하는 포맷은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에도 영감을 주어서 터닝메카드, 신비아파트 등이 유사한 구조를 갖게 했고, 이에 따라 끝없이 캐릭터 피규어나 장난감이 나와서 부모들 입에서 악 소리가 나게 하고 있다.


요괴워치2 (출처 : GAMESHOT.NET)

                                     


영화 <운명 : 가마쿠라 이야기>(2017)


 여러 콘텐츠에서 신이나 요괴, 정령 등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그들을 사악하거나 위협적인 존재로 여기지만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대부분 오래된 물건같은 것에 깃들어 각자 나름의 사연이 있고 인간세상에 인간과 함께 존재하면서도 다른 세상, 즉, 신의 영역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경계를 침범하게 되면 이상하거나 불행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영화 [운명 : 가마쿠라 이야기(鎌倉物語)](2017) 역시 신토의 만물신 사상에 발을 딛고,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들이 경계를 넘나들다 생기는 이야기다. 일본 국민 배우의 반열에 오른, [한자와 나오키(半沢直樹)]의 사카이 마사토(堺 雅人)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의 배경은, 이유는 알수없지만 극 중 설명에 따르면 '요기가 가득해 요괴나 영들이 섞여 살며 마주치기도 쉽다'는 가마쿠라 지역이다.  


영화 [운명 : 가마쿠라 이야기] 포스터. 온갖 정보를 망라한 일본 영화 특유의 포스터 디자인이 흥미롭다.

                                                                             

 왜 하필 가마쿠라 지역에 요기가 넘친다는 건지 역사적 이유가 있을 듯 하여 여러 모로 알아보았으나 특별히 어떤 연원은 발견하지 못했다.(일본 역사상 내란이 일어난 것도 한두번이 아니고 사람이 많이 죽은 지역이 꼭 가마쿠라만 있는 건 아니기에) 다만, 가마쿠라 막부 말기 남북조 시대, 가마쿠라 막부의 외척인 호죠(北條) 일가가 권력을 잃고 단체로 몇 백명이 자결을 하는 등 원한과 혼란이 있었던 지역인 점을 비교적 가까운 이유로 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하튼, 극 중 작가인 잇시키 마사카즈(사카이 마사토 분)는 운명적 이끌림으로 출판사 아르바이트로 찾아온 23세 아키코와 서로 첫눈에 반해 나이차이 많이 나는 결혼을 하게 된다. 아내 아키코는 집에 붙은 가난의 신(貧乏神 ; 빔보가미)까지도 따뜻하게 대접하고 편견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천진하고 밝은 성격이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 앞에 집 마당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갓파(물가에 산다는 초록색 피부에 머리털이 없는 요괴)가 뽈뽈뽈.. 걸어다니고 그 밖에 이름 모를 작고 귀여우며 무해한 정령들이 마당 한 켠에 삼삼오오 모여서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말소리를 내고 있다. 집 근처 밤 거리를 걷다 우연히 발견한 야시장에는 기괴한 형상의 요괴들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생필품과 먹거리 등을 팔고,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이 공존하는 이 공간에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이웃집 할머니를 마주쳐 다정하게 이야기를 주고 받기도 한다. 작가인 잇시키의 출판사 담당 직원 츠츠미 신이치(극 중 이름이 생각이 안난다)는 간암으로 죽게 되는데, 남은 와이프와 딸 때문에 차마 이승을 그냥 떠날 수가 없어서 사신의 도움으로 개구리랑 악어 합친 것 비슷하게 생긴 형상의 요괴가 되어 현실 속에서 인간들과 공존하는 쪽을 택한다.


  많은 일본 콘텐츠들이 그렇듯이, 유일한 빌런 딱 1명(마리?)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많은 신과 요괴와 사신까지 나오는데도 딱히 악한 존재가 없는 것도 특징이다. 그리고 선악 구분과 사후 징벌에 대한 관념이 명확한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의 황천이란 천국, 지옥의 구분도 그다지 없어보이고 죽은 후 영혼들은 그저 이곳을 거쳐가며 미련과 집착, 집념 등 삿된 마음들을 버린 뒤 환생을 하러 간다. 앞에서 말한 유일한 빌런이 바로 그 삿된 마음들이 뭉쳐져 만들어진 존재다. 황천국의 모습은 각자의 생각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고 하는데 잇시키의 눈에 비친 황천은 기암괴석이 즐비한 선계와 같은 모습이다. 모든 게 마음에 달려있다는 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사상을 엿볼수 있는 대목인데, 일본 고대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94) 이래 신토와 불교가 섞여 하나가 되어 온 신불습합(神仏習合)의 양상이 엿보이는 일면이다.



원령(怨霊)에 대한 일본인의 독특한 대우


 이토록 사람이 아닌 존재에 대해 열려 있는 일본인들이지만, 원한을 품고 죽은 원령만큼은 두려워 했다. 그래서 원한을 품고 죽은 이들은 반드시 신사나 절에 모시고 예우를 한다. 원령이면 악신(惡神)이니 그에게 뭔가 기원한다는 건 좀 안어울리는 것 아닌가 싶지만, 오히려 원한이 강하면 강할 수록 힘이 강하고 따라서 달래야만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더욱 우러러 공경을 하고 정성들여 신으로 섬기는 경우가 더 많은 듯 하다. 더군다나 그런 원령을 모신 신사는 보다 법력이 세다고들 한다는 설.


 이를 테면, 나라 시대의 학자이자 관료였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 845~903)는 권력 투쟁에서 밀려 수도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유배지에서 죽었으나, 그의 원한을 두려워한 후대 사람들에 의해 벼락의 신이자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으며 기타노덴만구(北野天満宮)의 제신으로 모셔졌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공부의 신,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또 일본 역사상 가장 원한이 깊은 인물 중 1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스토쿠천황(崇徳天皇, 1119~1164, 재위 1123~1142)도 있다. 스토쿠천황은  아버지 도바법황(鳥羽法皇, 1103~1156, 재위 1107~1123)에 의해 권력을 잃고 사누키에 유배되었다가 불우하게 죽음을 맞았는데, 오히려 죽은 후에는 여러 신사와 절에서 기릴 뿐 아니라, 신사 중에서도 크고 법력이 센 신사에 속하는, 선박의 해상 안전을 돌본다는 고토히라구(金刀比羅宮)의 제신으로 모셔져 있을 정도다.


(좌) 사후 뇌신으로 변해 정적을 공격하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 (우) 사누키에 유배되어 원한을 품고 죽은 스토쿠천황


 오히려 가장 악하고 무섭게 여기는 존재는 죽은 이의 원혼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의 원념(怨念)이 그도 모르게 빠져나와 원령으로 변한 생령(生霊)이다. 가장 유명한 생령은 일본 고대 헤이안시대의 궁중소설,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에 나오는 로쿠조미야스도코로(六条御息所). 주인공 겐지와 내연관계였던 로쿠조미야스도코로는 겐지의 정실 아오이노우에(葵上)를 질투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잠자는 중에 원념이 생령으로 변해 날아가서는 아오이노우에를 살해하고 만다. 역시 가장 무서운 건 신이나 요괴, 정령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일까.


그 유명한,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가 그린, 생령으로 변한 로쿠조미야스도코로



왜 일본은 만물신의 나라가 되었나


 일본의 신(神)의 개념에 대해 일본 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정의한 바를 바탕으로 다시 말하자면, 일본의 신이라는 것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람은 물론이고 새, 짐승, 나무, 풀, 바다와 산, 바위, 오래된 빗자루나 가재도구 같은 구체물인 경우가 많고, 사물이 아닌 구체적인 현상일 때도 있다. 예를 들면 갑자기 하품이 난다거나, 딸꾹질이 멈추지 않는다거나, 늘 똑같이 하던 대로 했는데 밥이 설익는다거나...어쨌든 뭔가 평범하지 않은 구석을 가지고 있는 사물이나 현상은 무엇이든 신격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토록 신(神)과 같은 존재가 많은 일본이어서 그런지, 일본에서는 그리스도교가 그다지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뿐더러, 불교조차 신불습합으로 신토와 오묘하게 섞여 생활 속에 녹아들어버린 독특한 나라가 되었다.(물론 깊이 들어가면 신토와 불교가 관장하는 영역이 각기 현생과 내세로 혹은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 등으로 나뉜다는 연구도 있지만 여기선 그렇게까지 다루진 않겠다.)


 다만, 왜 유독 일본에서는 유일신 신앙이나 지배적인 종교가 자리잡지 못하고 애니미즘이 지속되었는가, 라는 의문에 대해서는 지진 등 자연재해를 워낙 많이 겪다보니, 또한 혹독한 무가 정권과 내란이 지속되다 보니, 만물을 신으로 여기고 기원하는 습속이 생겼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건 좀 부족하다. 기실 자연재해나 혹독한 정권 하에 백성들이 고초를 겪은 나라가 일본만은 아닐테니 말이다.


 보다 동의할 만한 설득력이 있는 또 다른 설로는, 조상신이나 원한을 품고 죽은 사람을 신격화하는 인신(人身) 신앙이 발달하면서 신이 엄청나게, 늘어나게 된 것 아니겠느냐는 설도 있다. 불완전한 인간이라 해도 생전에 뛰어난 업적을 남기거나 마땅히 위무받아야 할 억울한 점이 있다면 신이 되어 섬김을 받을 수 있게 됐고, 이렇게 이유 있는 신들이 늘어나다보니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신들을 부정하고 유일신으로 정착하기는 무리가 있었다는 얘기다.


신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일본인들은 식사 때 젓가락을 쥐기 전 혹은 직후에 두 손을 합장하고 "잘 먹겠습니다(いただきます)"라고 말하곤 한다. 두 손을 모아 합장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인사는 차려 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고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신(神)을 향해 하는 말인 셈이다. 새해에는 신년운세를 점치고 행운을 기원하기 위해 신사에 가고, 합격을 위해서는 공부의 신을, 출세를 원하면 출세의 신을 모신 신사를 찾는다. 헤이안 시대의 유명한 음양사(陰陽師 : 고대 일본의 관직, 음양오행 사상을 기초로 점술, 주술, 제사 등을 담당)였던 아베노세이메이(安倍晴明) 신사는 놀랍게도 교통 안전을 기원하는 신사가 되어 있다.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교토의 버스마다 세이메이 신사에서 나온 부적 스티커를 붙이고 있는 것을 봤던 기억이 아마 있을 것이다. 찾자고 들자면 끝이 없을 정도로, 이렇게 그들은 오늘도 사람이 아닌 것들과 자연스럽게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참고 : 박수철, 특별서평 <신사와 야오로즈가미의 나라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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