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에 관한 단상들
반려견 놀이터를 이용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개와 산책을 하기 위해 온다.
목줄 없이 뛰어놀 수 있기에 개에게는 자유와 행복의 공간, 놀이와 사교의 공간이다.
그런데 간혹 사육사 혹은 개훈련사가 개를 끌고 올 때가 있다. 대형견에 해당하는 얘기이다. 간단한 훈련 시설이 갖추어진 월드컵공원 놀이터에서 이런 방문자를 여러번 목격했다. 그렇게 방문한 개들을 보면 똑똑하고 운동능력이 뛰어나다. 보더콜리, 셔틀랜드쉽독, 세퍼드 등의 견종들.
그런 견종들은 동작의 절도가 있고 민첩하고 무엇보다 견주에 대한 충성도와 집중력이 대단하다.
'나도 저런 개가 있었으면...'
이에 비해 내가 키우는 개는 내가 주인인지 몸종인지 외출만 하면 나란 존재는 안중에도 없고, 움직임에 절도란 찾아볼 수 없고, 이리 저리 방방 뛰고, 아무한테나 막 안기고, 갑자기 예민해져 정신없이 짖어대는 통제불능의 존재다.
그런데 저기 몇 미터 앞에는 다른 차원의 개가 보인다. 주인의 동작과 소리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우아하고 절도 넘치는 개. 저 개가 나의 개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맘이 절로드는 모습들이 눈앞에서 연출된다.
하지만, 여러번 보고 또 자세히 관찰해 보면 꼭 그렇게 감탄만 하게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서글프고 불쌍하단 생각이 들때가 더 많은 요즘이다.
견주가 개를 혼내는 모습을 봤다.
엄하고 냉정하다. 그럴 때 개는 어쩔 줄을 몰라한다. 주인의 눈이 무서워 마주치지도 못한다.
그럴 땐 대개 관용이란 없다. 제대로 할 때까지 훈련과 질타가 반복된다. 주인과 개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
민망해 눈을 돌리게 되는 풍경이다.
이렇게 훈련을 받은 개들은 다른 개들, 다른 사람과 접촉해 놀거나 쉬는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주인 곁에 딱 붙어서 어디에도 눈길을 주지 않고 주인이 시키는 행위들을 반복하다 놀이터를 떠난다.
그들에게 놀이의 시간은 보이지 않는다.
남들이 보기에 멋있고 든든하다.
하지만 어딘가 씁쓸하다.
*
그런 훈련들이 과연 개에게 합당하고 정당한 삶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의 본성에 맞는 일상일까하는 의문이다.
철저히 훈련을 받아야 하는 개들이 있겠다.
특수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개라면 운명이려니 어쩔 수 없지만 그런 개를 반려견 놀이터에서 만나는 일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닌 듯싶다.
어디까지나 그들이 방문한 장소는 훈련소가 아니라 반려견 놀이터라 이런 감정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전문 훈련사가 아닌데 자기 개를 멋지게 훈련시키고 싶어 어려서부터 엄하게 키우는 주인들이 있다는 거다. 몇 번 봤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것도 같다)
'내 개, 내가 하고싶은 대로 키우는 데 무슨 상관?!!'
'맞다,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물어보고 싶다.
'당신의 소중한 개가 그렇게 살고 싶은지 물어보셨나요?'
세련된 경직성!
나는 이걸 ‘세련된 경직성’이라 부르고 싶다.
멋지지만 주인만 바라보는 동물기계. 주인을 모시기 위해 사는 비서개?!! 누군가의 보조, 누군가의 명견!
그것이 개를 위한 것일까? 자신의 과시욕과 편리를 위해 일상에서 개의 자유와 친구를 사귈 권리를 박탈한 건 아닐까 하는 의심들...
'똑똑한 개를 계획 없이, 생각 없이 그냥 키우는 거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람이 있겠다.
뭘 몰라도 진짜 모른다 판단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철저한 훈련이 무엇보다 중요한가요? 개의 행복하고 편안한 일상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훈련보다는 대신 늘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 개가 알아서 똑똑해질 거라 믿어요. 더 사랑받고 싶어서요.
개가 당신에게 늘 하듯이 하면 안될까요? 그게 진짜 아닐까요?! 좋은 건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 보아도 좋잖아요! 눈에 보이잖아요!’
똑똑한 종이란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나의 평범한 개들은 언제나 내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똑똑했다.
그래서 난 이 말을 할 수 있는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