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편지
황금마차 사무실.
어떤 남자가 다시 사무실을 방문했다.
남자 손에 편지가 쥐어져 있다.
척이 고개를 숙여 용서를 구한다.
척 미안하게 됐습니다. 상처가 되셨다면 어떤 보상도 해드리겠습니다.
남자 아닙니다. 연락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꾹 한번 읽어 보세요!
남자 네.
[남자는 실제로는 눈으로만 읽는 설정이지만 관객에게 그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낭독을 한다.]
영숙에게
영숙아! 나 기태다. 미안타. 너무 미안타. 이제사 편지를 쓰는구나. 인생은 참 뜻대로 되지 않는가부다. 그냥 영영 영숙이 너에게는 연락도 안 허고 죽으려 캤는데 막상 죽을 때가 다가오니 네게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죽지도 못하겠구나. 네가 나를 찾는다는 얘기 많이 들었다. 그 소리 들을 때마다 더 멀리, 더 멀리 도망쳤다. 절대로 나를 만날 수 없게끔.
그렇게 숨어 살다가 어느 날, 청량리 시장에서 우연히 널 봤어. 한눈에 알아봤지. 마음이 무겁고 복잡했다. 그런데 한편으론 용기가 나기도 했어. 이렇게 숨어 사느니 말해버리자. 그리고 무엇이 됐든 받아들이자. 그러면 좀 내가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지. 그래서 너의 뒤를 따라갔다. 장바구니를 들고 가는 너를 따라 모퉁이를 도는데…….
네가 아들 녀석하고 같이 있는 모습이 보이더라고. 아들하고 같이 서 있는 너를 보니까, 딱 봐도 윤구를 닮은 아들을 보니까, 숨이 탁 막혀서 더 이상 걷지를 못하겠더라. 누가 내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 그 길로 난 도망쳤다.
윤구랑 니랑 나랑 셋이서 개구리 잡고 꽃팔찌 만들던 그때가 자주 떠오른다. 꼬맹이 때 만나 뒷산과 개울을 발정 난 망아지마냥 뛰어다녔던 우리들인데, 어찌 이리 나이를 먹어버렸노.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구나.
영숙아, 너는 잘 알지? 윤구는 개구리도 한 마리 못 잡고, 파리 한 마리도 못 죽이는 거, 그지? 근데 그런 윤구를 내가 베트남까지 데리고 갔다. 죽어도 갈 생각 없다고, 너 때문에 못 간다 하는 걸, 돈 많이 벌 수 있다고 내가 꼬셨지. 영숙이 돈 많이 벌어다 주면 얼마나 좋아하겠냐며 말이야.
어떻게 그렇게 몰랐을까. 어떻게 그리 바보 같았을까. 베트남 도착한 첫날부터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었어. 엄니, 아부지가 있는 고향으로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고 싶었다. 나 힘들 때마다 윤구는 내가 있어서 든든하다고, 불알친구 있어 든든하다고 날 위로하곤 했다.
그랬던 윤구인데, 참말로 사람 좋은 윤구인데…… 영숙아, 영원히 날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영원히! 영숙아, 나는 참말이지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구나. 윤구는 말이다…… 베트콩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니고…….
[척과 꾹이 기태와 윤구가 돼서 연극을 진행한다. 척이 기태 역할을, 꾹이 윤구 역할을 한다. 두 사람은 군복으로 갈아입어도 좋고 그냥 원래 복장에서 작대기를 들고 혹은 장난감 총(혹은 진짜 장총)을 들고 베트남의 민가를 탐색하고 있는 상황이다.]
여자(베트남 여자)의 신음 소리가 들린다. 군인 하나가 원피스를 입은 베트남 여자 위에 올라타 여자를 겁탈하고 있다. 여자의 신음 소리가 커지자 군인은 여자의 입을 막고 폭행을 가한다.
무대 한쪽에서 윤구가 잔뜩 긴장한 채 등장한다. 총구를 앞으로 향한 채 주위를 경계하며 다가온다. 신음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따라온 것이다.
윤구 기태야, 어디야? 어디 있어? 여기 위험해. 같이 이동해야 한다고! 어디 있어? 내 말 들려, 기태야!
기태는 윤구가 가까이 온 것을 알고 동작을 멈추고 잠시 동태를 살핀다. 하지만 다시 음란하게 몸을 움직인다. 이전보다 조심스러운 움직임이다. 여자의 신음 소리가 미세하게 새어 나온다. 윤구, 소리를 의식하고 이동한다. 두 남녀를 발견한다.
윤구 꼼짝 마! 움직이지 마! (사이) 손들어!
기태가 하던 동작을 멈추고 손을 든다.
윤구 설마 너, 기태?
기태가 몸을 돌린다.
어색하게 미소를 짓는다.
윤구 너 지금…….
기태 긴장 풀어. 나야 나.
윤구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지금 뭐 하고 있냐고?
기태 보면 모르냐. 잠깐 걍, 잠깐~ 죽이려다가, 그냥 죽이기 아깝잖아. 쫌만 기다려라! 쪼끔만 더 하고 거의 다 됐거든.
기태가 다시 여자 쪽으로 몸을 돌리려고 하자 윤구가 소리친다.
윤구 멈춰! 당장 멈추라고! 너 미쳤어?!
기태 죽이려고 하다가 걍~
윤구 죽이긴 뭘 죽여?
기태 야! 나도 미치겄다. 나도 쫌 살자!
윤구 이 여자 민간인이야. 적이 아니라고.
기태 여기에 베트콩 아닌 게 어딨어? 어디 이마에 써 있어? 다 씨발 베트콩 새끼들이지. 이년들이 우릴 얼마나 죽인 줄 너 모르냐?!!
윤구 민간인이라고!
기태 알았으니까, 너 딴 데 수색하고 있어. 내가 금방 따라갈 테니까. 여기 신경 끄고 (자신의 성기를 내려다보며) 죽었네, 다 죽었어. 씨이~
윤구 당장 일어나! 당장!
기태 야, 너도 할래? 너도 줄까?
윤구 닥치고! 당장 일어나!
기태 알았으니까 꺼져 있어라아~
윤구가 기태의 몸을 발로 찬다. 기태 넘어진다.
기태 미쳤냐?!
윤구 미친 건 너지. 여자 냅두고 어여 나와!
기태 야, 윤구야! 이런 기회가 자주 오는 게 아니야. 나도 사람이라고!
윤구 니가 지금 사람이라고 했냐 시방. 그게 나한테 할 소리야!
기태 씨발, 난 하고 갈 테니까. 알아서 해라!
윤구가 기태의 이마에 총구를 댄다.
기태 시방, 니가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윤구 (떨리는 목소리로) 기태야, 정신 차려 제발! 우린 짐승 아니잖아. 우린 군인이라고!
기태 아니. 우린 짐승이야. 아님 죽어. 아님 여기서 못 살아. 너, 나 쏘려고 이러는 거냐? 쏴 봐! 쏴 보라고! 퍽이나 쏘겠다. 잘됐다! 너 지금까지 요로케 산 거 순전히 나 때문 아니냐! 니가 늘 허공에다 총질할 때 니 대가리 조준한 새끼들 내가 다 쏴 죽였잖아. 여기까지 와서 혼자 고상한 척은 쪼또. 잘 들어! 사람?! 여기 사람이 어딨냐고?!
윤구가 대답을 못 하고 멍하니 있는 사이, 기태가 윤구의 총을 빼앗는다. 두 사람은 총을 가지고 실랑이를 한다. 그 사이 여자가 기어서 도망간다. 기태가 여자 다리를 쏜다. 여자가 총상을 입고 고통스러워한다. 기태가 윤구를 뿌리치고 여자에게 다가간다.
기태 니도 아쉬웠지. 저 새끼가 눈치가 좆나게 없어서. 행복하게 해주려고 했는데…… 니 팔자도 여기까지인가 보다. 가라!
기태가 베트남 여자에게 총을 쏘는데, 그 앞을 윤구가 가로막아 선다. 총알은 윤구의 가슴을 관통한다.
윤구 (작은 소리, 떨리는 소리로) 안 된다. 보내. 줘. 기태. 야. 그럴. 거. 지. 응?!!!
기태 야, 이. 진짜, 너. 지금. 왜. 왜. 왜. 왜 빙신아!
윤구가 조용히 눈을 감는다. 몸이 축 늘어진다. 기태가 윤구를 안고 흐느낀다.
기태 이 빙신아! 니가 왜!!!
잠시 후, 기태는 일어나 허공을 향해 소리를 지른 후 여자에게 다가가 머리에 총을 쏜다. 여러 발을 멈추지 않고 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