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죽음
어두운 고시촌. 어느 방 하나.
세 사람 문을 열고 들어온다. 헤드랜턴을 켜고 들어와 주변을 살핀다. 시체가 있던 자리를 발견한다. 꽃들이 한쪽에 놓여 있다.
척 젊은 여자였대요. 벌거벗은 채로 죽었대요.
꾹 으메. 뭔 일이래?
척 고아인가?
꾹 고아?
탁 죽을 땐 다 고아지. (혀를 찬다.)
세 사람, 시체가 있던 자리를 말없이 멍하니 내려다본다.
꾹 으메, 이런 말이 시의적절한지 모르겠는데 추한 게 아니라 아름답지 않았을까요?
척 원래 사람의 벗은 몸은 아름다워.
탁 아름답지.
조용히 흐트러진 꽃들을 내려다보는 세 사람. 잠시 후, 척과 탁은 일을 하기 시작하는데 꾹은 여자의 물건들을 뒤진다. 그중 일기장을 찾아 훑어보기 시작한다.
척이 주변을 둘러보다 꾹이 일기장을 뒤적이는 모습을 본다. 꾹의 뒤통수를 친다.
척 이제 이딴 짓 안 하기로 했지.
꾹 이 여자 자기를 엄청 학대했어요. 자기를 미워했어요.
탁 망자 괴롭히지 마라!
척 자꾸 딴짓해서 우리가 부정 타는 거야. 작살나게 줘터지기 전에 어여 내려놔!
꾹 형, 여기에 시도 있어요. 시요.
탁 육시랄!
척도 포기한다. 척과 탁은 꾹을 내버려두고 묵묵히 주변을 정리한다. 꾹이 일기장에 몰입돼 남들이 듣거나 말거나 시를 읽는다.
꾹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고 밤은 그 강력한 침입으로 나를 엄습했다. 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버리고 내 화살의 활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 버렸다. 그러나 이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 일부)
잠깐 여운을 두다가 다른 구절을 찾아 읽는다.
꾹 '인근에까지 소문이 난 국수집에 낯선 차들이 붐비고 있어서 이 고장은 대도시로 흘러 들어가는 하천의 더러운 지류 같다. 저 남자는 초등학교 동기가 아니지만 그와 닮았고 저 여자는 동생이 아니지만 동생과 닮았고, 나와 닮지 않은 내가 지나가고 있는 풍경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하다. 내 욕망이 한 번도 깃들지 않은 곳,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 (조말선의 시 일부) 그런 곳들이 있겠지. 나도 알 것 같다.
사이.
꾹 이제는 내가 마지막인 것을. 내가 마지막이다.
척 (일기장 뺏어 던져버린다) 집어치우라고!
꾹 (떨어진 일기장을 집어 들며) 이렇게 함부로 다루면 안 돼요. 이렇게 버려지면 안 된다고요.
탁 이젠 비밀로 남겨두기로 약속했잖아. 망자의 물건 손대지 않기로.
꾹 척형, 누군가는 기억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버려진 죽음, 그냥 쓰레기 치우듯 치울 게 아니라요. 이 사람 그래도 누가 이 억울함이나 쓸쓸함 기억해주기를 원하지 않았을까요? 살려고 세상에 왔다 죽었는데 그 이유라도 함 기억해주어야 하지 않냐고요.
척 그럴 필요 없어.
꾹 왜요?
척 그럴 필요 없으니까! (일기장을 뺏어 이번에는 찢어버리며) 이미 저주받은 사람들. 우리 따위가 뭔 도움이 된다고. 다 쓸데없는 짓이야!
꾹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척 니가 성자야, 목자냐고. 일이나 똑바로 하고 이따 술이나 먹자. 이 일도 갈수록 못해 먹겠다.
꾹은 찢긴 일기장을 다시 모은다.
꾹 이 여자는 사랑 때문에 죽은 거 같아요. 사랑이요, 사랑.
탁 (조용한 소리로) 육시랄, 반장아! 나 이제 쟤랑 일 못하겠다.
척 너, 당장 나가! 너 같은 놈 필요 없다. 당장 나가!
척은 꾹에게 당장 나가라고 소리치며 밀치지만, 꾹은 이상하게 동요가 없다. 척과 탁의 말을 흘려듣고 여자의 죽음에 몰입돼 여자의 일기장을 뒤진다. 여자가 쓴 글들을 읽는다.
그러다 꾹은 또다시 유령과 마주치게 된다. 그런데 전과는 달리 놀라거나 도망치지 않고 비교적 덤덤히 유령을 응시한다.
꾹 어이, 훠이, 훠이~
환영 314, 314, 314.
꾹 (비교적 차분한 말투) 어이, 훠이, 대체 왜 그래? 내게 뭘 원하지? 너 이 여자를 알아?
환영 가여운 것, 가엾고 서글픈 것!
꾹, 심호흡을 크게 하더니 전과 달리 환영을 바라보려고 한다.
꾹 당신 얼굴을 보여줘! 얼굴을 봐야겠어. 가까이, 가까이.
환영이 꾹에게 다가온다. 그의 형상이 조명으로 인해 점점 밝아진다. 선명해진다.
꾹 (얼굴을 보고 놀라 호흡이 빨라지며) 아저씨, 아저씨 아니세요? 아저씨가 여기 웬일이세요? 척형, 여기, 여기,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나 좀 봐봐. 여기, 아저씨 계셔. 척형, 나 좀 보라고!
꾹이 척의 몸을 끌어당겨도 반응이 없다. 꾹의 움직임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마치 꾹이 투명 인간이라도 되는 양 반응이 없다. 꾹은 결국 척의 앞을 막아서더니 척의 뺨을 때리기에 이른다.
꾹 형! 아버지라고!
척 (잠든 상태에서 깨어난 것처럼) 어?
꾹 형, 저기 봐! 형 아버지야!
척, 꾹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다. 유령을 보게 된다.
유령과 마주하는 척.
척 아버지!
마주 보는 두 사람.
사이.
사이.
꾹과 탁 자연스레 무대에서 사라진다.
척, 전화기를 꺼내 어딘가로 다급하게 전화한다.
기계음 지금은 전화기가 꺼져 있어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음성사서함으로 연결 시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삐익!
척이 핸드폰에 대고 대사를 하는 사이 무대가 점점 어두워진다.
척 아부지, 나야! 이 전화 받으면 즉시 연락 주세요. 아부지, 아무래도 몸이 안 좋으신 거죠? 답답하고 아프고 힘들어서, 그래서 나 찾은 거지? 신호 보낸 거지? 근데 지금 아버 지 어디 사는지 몰라. 군산에 지금도 살아? 이 내용 들으면 바로 전화 줘요, 바로. 아부지, 아부지! 살아 계신 거 맞지? 그냥 좀 아픈 거지? 전보다 조금 많이 아프셔서 그런 거지? 그지?
어둠 속에 두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