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이 마지막인줄 알았다면
아귀가 맞지 않아 삐걱거리는 대문을 열었다.
구두 굽 소리가 빈 마당 위 시멘트를 두드리며 지나갔다.
차가운 촉감의 알루미늄 현관문을 밀자 희미한 방 문 유리 뒤로 그림자가 움직였다. 방문이 천천히 열리며 할아버지가 보였다.
“춥다. 어여 들어와라.”
방안에 들어서자 오랫동안 갇혀 있던 공기가 쾌쾌하게 코를 찔렀다.
아흔의 할아버지, 그것도 홀로 지내는 할아버지가 집 안을 청소하거나 이불을 빨거나 환기를 했을 리 없었다. 그렇게 묵은 냄새 속에는 오래된 로움이 엉겨 붙은 듯했다.
나는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은 표정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와 함께 절을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밥 먹어라, 과일이라도 먹어라”라고 권했지만, 우리는 합창하듯 먹고 왔다고, 배가 부르다고 손사래를 쳤다.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아 차가운 마룻바닥에 앉은 엄마와 아빠는 할아버지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줄곧 핸드폰만 내려다보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아빠가 “가자”고 하자 나는 서둘러 “할아버지, 저희 갈게요”라는 짧은 인사를 건네고 신발을 신었다.
대문을 나와 좁은 골목길을 걸으며 내가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 정말 정정하시다. 앞으로 십 년은 거뜬히 사실 것 같아.”
그날이 할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한 달 뒤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진 할아버지는 구급차에 실려 시내의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다시 두 달 뒤의 어느 밤, 간호사의 휴대폰을 통해 아빠에게 걸려온 영상통화가 할아버지와의 작별이었다. 코로나는 가족들이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떠난 지 이 년 반, 할아버지도 할머니를 따라 떠났다.
치매를 앓은 할머니는 5년 동안 병상에 누워 계셨다. 병원에 입원하신 날부터 떠나는 날까지, 우리는 매 순간 할머니의 죽음을 미리 겪으며 살았다. 그래서인지 장례식에서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어쩌면 할머니의 지독한 손자 사랑에 밀린 손녀의 서운함과 서러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의 죽음도 그렇게 담담하게 넘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할머니의 손자 사랑 뒤에는 할아버지의 보탬도 있었으리라 믿으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죽음은 그 생각들을 깨뜨리고 다른 기억들을 불러왔다.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배를 타며 평생을 살았던 할아버지는 어두운 새벽에 바다로 나가 해가 지기 전에 돌아왔다. 내가 일곱 살 무렵인가 동생 손을 잡고 할아버지를 마중 나가던 기억이 난다. 집을 나와 꼬불꼬불한 돌담길을 10분 남짓 걸으면 부두에 다다랐다.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 틈에서 할아버지를 발견하면 우리는 온 부두가 떠나갈 듯 크게 외쳤다.
“할~~아버지!”
우릴 발견한 할아버지는 두 팔을 하늘 높이 흔들었고, 우리는 힘껏 뛰어 할아버지의 품으로 달려갔다.
할아버지의 삶을 생각했다.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한 뒤로 매일 홀로 아침을 맞이하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누워 잠이 들었을 할아버지. 자식들이 가져온 반찬과 과일을 혼자 꺼내 먹었을 할아버지. 오랜만에 찾아온 우리가 반가워 이것저것 권하던 할아버지. 손자가 사준 새 텔레비전을 하루 종일 켜두고 지냈을 할아버지.
보고 싶다, 자주 좀 오너라, 더 있다 가라는 말들을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할아버지.
열아홉 살의 앳된 얼굴로 해군이 되어 전쟁에 참전한 할아버지. 죽음이 빗발치던 전장에서 기적처럼 살아 돌아와 잠 못 이루는 밤이면 바닷가를 뛰어다녔다는 할아버지. 나라를 구했다는 자부심 하나로 평생을 살아오신 할아버지.
구십 년의 세월을 살아낸 할아버지는 그렇게 홀로 눈을 감았다.
한 사람이 생을 마감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일이다. 더 이상 웃어 보일 수도, 말을 건넬 수도, 밥숟가락 위에 반찬 하나 올려줄 수도 없는 일이다.
며칠 전, 할아버지가 계신 호국원을 찾았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잘 지내시죠?”
얼굴을 마주할 때는 하지 못했던 다정한 안부를 비석을 보며 건넸다.
무뚝뚝했던 손녀는 이제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주 조금 눈물도 맺혔다.
그 마지막이 마지막인 줄 몰랐던 그날 이후, 내 주머니 속에는 항상 꺼내지 못한 후회가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