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을 대하는 나의 자세
나는 쿨하지 못하다.
이름은 시원한데, 마음은 종종 눅눅하다.
나이 들어감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더 그렇다.
"주름도 나의 역사야", "지금이 제일 좋아" 같은 문장에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막상 거울 앞에 서면 그 멋진 말들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내 얼굴에 새겨진 선 하나, 머리카락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흰빛 하나하나가 자꾸 마음을 건드린다.
몇 해 전, 엄마와 이모들과 함께 수국 카페에 갔다.
수백 평 꽃밭에 수국이 흐드러졌고, 나는 들뜬 마음에 외쳤다.
“엄마, 이모들~사진 찍어드릴게요! 너무 예뻐요!”
엄마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나 사진 안 찍을래. 못생기게 나와. 주름도 많고…”
이모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나는 진심으로 이상했다.
“지금 그대로도 예쁜데, 왜요? 나이 든 모습도 좋은걸요.”
그런데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고작 마흔 중반이면서도, 나도 거울 앞에서 고개를 돌린다.
사진을 자꾸 뒤적이다가 삭제하고, 누가 찍어준 사진을 올릴 때도 망설인다.
내가 엄마에게 했던 말들이 내게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지금이 좋은 거라며?"
"나이 듦을 받아들이라며?"
그 말들이 내 안에 맴돌지만, 지금의 나는 그 말들을 곱씹기만 할 뿐, 선뜻 삼키지 못한다.
나이 든다는 게 이렇게 실감 나고, 이렇게 어색할 줄 몰랐다.
며칠 전, 동생과 계단을 내려가다가 중심을 잃고 발을 헛디뎠다.
넘어진 건 아니었다.
“아, 나이 들어서 그래.”
순간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누가 물은 것도 아닌데, 그냥 그렇게 말했다. 요즘 나는 나이 탓을 꺼낸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예전보다 더 쉽게 피로를 느낄 때도 같은 말을 한다.
마치 누군가에게 설명하듯, 아니면 나 자신을 설득하듯 그렇게 중얼거린다.
여행을 다녀오면 꼭 하게 되는 말도 있다.
“역시 집이 최고야.”
예전에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미 다음 여행을 계획했는데,
요즘은 낯선 이불보다 익숙한 침대가 더 좋다.
어느 맛집보다 칼칼하게 끓인 김치찌개가 더 당긴다.
나는 지금 어떤 경계에 서 있다.
청춘과 노년 사이, 활기와 무력 사이, 나다움과 익숙한 낯섦 사이.
사회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애매한 위치다. 청년이라 하기엔 멀고, 노인이 되기엔 아직 이르다.
신체는 느려지고, 마음은 자꾸 과거의 나를 기준 삼는다.
이도 저도 아닌 시기, 그래서 더 자주 마음이 멈칫거린다.
그러다 문득, 내가 좋아하는 계절의 사이가 떠오른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즈음.
단풍이 마지막 색을 태우고 바람에 흩날릴 때, 나무는 모든 걸 벗는다.
햇살은 사라지고 공기는 마르고, 땅은 얼기 시작한다.
그 시간은 애매하지만, 모든 변화는 늘 그 사이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나는 그런 계절을 좋아했다. 봄에서 여름사이, 여름에서 가을사이.
그리고 가을에서 겨울사이.
그날의 사진을 꺼내 본다.
주름이 많다며 사진을 거절하던 엄마와 이모가 활짝 웃고 있다.
자꾸 눈이 간다.
시간이 천천히 내려앉은 얼굴.
주름보다 웃음이 먼저 보이는 얼굴.
나는 요즘 거울 앞에 자주 서 있으려 한다.
조금 망설여도, 그때의 나니까 남겨두려 한다.
집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는다.
창밖에서는 첫눈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눈송이는 가볍게 내려앉아 동네를 하얗게 덮는다.
나는 종이를 펼치고 펜을 든다.
“친애하는 나에게”라고 쓴다.
그리고 이어 적는다.
엄마와 이모가 사진을 꺼리던 그 마음, 이제 알 것 같다고.
나이 듦은 가을의 단풍이 겨울로 넘어가는 것과 같다고.
화려했던 잎은 떨어지고, 나무는 앙상해지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계절을 준비한다고.
나는 그때의 내가 함부로 판단했던 것을 떠올리며 조용히 웃는다.
겪지 않은 계절은 오해하기 쉽다.
나는 야금야금 보이는 흰머리와 주름, 뻣뻣한 무릎과 함께 이 ‘사이’를 걸어간다.
그래서 오늘도, 그냥 지금의 나를 바라본다.
조금은 다정하게, 친애라는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