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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그레이 May 25. 2024

짧은 소설) 예술하는 페인트공


중년의 박영수는 30년 가까이 한 회사에서 성실하게 일해왔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정장을 차려입고, 잠든 아내 수연을 뒤로한 채 조용히 출근했다. 그는 항상 그녀를 위해 헌신하며 누구보다도 성실했다. 출근길에 마시는 커피 한 잔과 지하철에서 읽는 신문이 그의 하루를 시작하는 일상이었다. 회사에서는 누구보다 신뢰받는 직원이었고, 동료들과의 회식 자리에서도 늘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였다. 상사들에게도 그의 성실함과 열정은 늘 인정받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회사 내에서 그의 위치는 점점 불안해졌다. 젊고 유능한 직원들이 회사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영수는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점차 배제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오해라 생각하며 더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회사의 분위기는 변하고 있었다.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를 가진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 영수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었다.


결국, 어느 날 회사는 새로운 인재들을 채용하며 영수에게 퇴직을 권유했다. 상사의 말은 냉정했다. “박 과장님, 회사도 이제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때입니다. 박수 칠 때 떠나라, 그런 말 아시죠?” 상사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오랜 세월을 바쳐 일해온 회사에서 쓸모없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동안의 노력과 헌신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그는 아내 수연의 눈빛을 피하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수연은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그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영수는 침묵으로 답했다.


그의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깊은 우울감에 빠졌다. 밤마다 그는 침대에 누워 뒤척이며 자신의 인생이 헛되었다고 생각했다. 가족에게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자괴감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필요한 곳이 있을 거라며 일자리를 수소문했다. 오랜 세월 회사에 몸담으며 어느 정도 저축은 했지만,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돈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랑스러운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웠다.



그러던 중, 우연히 대학 동창인 김철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철수는 영수와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최근 큰 수익을 올린 투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영수야, 요즘 같은 시기에 은행 이자는 쥐꼬리만 하지 않냐? 내가 투자한 회사가 있는데, 여기서 잘하면 몇 배로 불릴 수 있어. 나도 여기서 꽤 벌었어. 너도 한번 해보는 게 어때?”


영수는 망설였지만, 철수의 설득과 함께 성공 사례를 보여주는 객관적인 자료를 확인하자 마음이 흔들렸다. 영수는 투자하기로 결심하고  ‘미래테크’라는 신생 벤처 기업을 소개받았다. 이 회사는 최신 기술을 기반으로 한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하고 있으며, 곧 몇 배 이상으로 상장할 예정이라고 했다. 철수는 자신이 얻은 수익 증빙 자료까지 보여주며 더욱 신뢰를 심어주었다.


“영수야, 이 회사는 정말 대박 날 거야. 나는 벌써 두 배 이상 벌었어. 지금이 기회야. 우리 부자 되는 거야!”


좋은 기회를 잡게 된 영수는 퇴사의 아픔은 금방 잊게 되었고, 미래의 부를 상상하며 행복해했다.


“당신이 다시 기운을 찾아서 다행이에요. 철수 씨와 사업이야기가 잘 되고 있어요?” 수연이 물었다. 영수는 큰돈을 벌어 수연을 놀라게 해 주기 위해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단지 새로운 사업을 구상 중이라고 했을 뿐이었다.


“응. 당신은 나만 믿고 있어.” 영수는 어깨를 펼치며 당당하게 말했다.


“여러분, 저희 미래테크는 차세대 기술을 선도하는 기업입니다. 지금 투자하시면, 1년 내에 최소 2.5 배의 수익을 보장합니다!”


회사 대표의 발표와 함께, 다양한 홍보 자료들이 투자자들에게 배포되었다. 영수는 설명회를 듣고 나서, 모아둔 돈의 절반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몇 달 후, 계좌에 실제로 돈이 늘어나는 것을 확인한 영수는 더 큰 욕심이 생겼고, 남은 저축액도 모두 투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투자 회사에서 보내오던 소식이 뜸해졌고, 문의 전화를 해도 답변이 없었다. 홈페이지에 접속해 보려 했지만, 사이트에 접속이 되지 않았다. 영수는 불안해하며 철수에게 연락했다.


“영수야, 나도 다 날렸어… 이게 사기였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철수의 목소리에는 깊은 후회와 좌절감이 묻어났다. 영수는 자신이 사기를 당해 전재산을 잃었음을 깨달았다. 충격과 절망감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퇴직 후 찾아왔던 작은 희망은 반대로 칼을 겨눠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그날, 그는 죽기로 결심했다. 편의점에 가서 소주 두 병을 사서 나왔다. 평생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던 영수였다. 그가 노상에서 소주 한 병을 다 마셔갈 때쯤 수연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는 철수에게 연락을 받아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영수 씨, 시간이 늦었는데 언제 들어와요?”


“수연아, 오늘은 먼저 자.”


“제가 어떻게 당신 없이 자요. 여보, 오늘 방 청소를 하다가 우리 아기 액자도 청소했어요. 그 사이 액자에 먼지가 잔뜩 쌓여서 잘 닦아냈더니 말끔해진 얼굴이 보이는데, 다시 봐도 당신이랑 똑같이 생겼더라고요. 그래서 당신 빨리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그들은 오랫동안 아이를 가지지 못했었지만 시험관 시술로 늦게 아이를 얻었었다. 그러나 그 아이는 두 돌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영수는 노상 테이블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새어 나오는 소리를 팔로 막았다. 수연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가 어떻게 시작했는지 기억나요? 정말 땡전 한 푼도 없었잖아요. 며칠씩 굶기도 하고 하하. 당신이 퇴사해서 한편으로는 조금 좋았어요. 우리 함께할 시간 많겠다, 신혼 때 같겠다 하면서요. 제 삶에 당신이 있어서 언제나 행복했어요. 어떤 어려움도 당신이랑 함께니까 모험 같고, 도전 같고…. 당신이 없었다면 제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거예요.”


“사실 나… 돈… 다 잃었어. 사업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투자하고 있었는데 사기당했어… 우리 이제 아무것도 없어... 지금 사는 전세 보증금 말고 정말 다 잃었어. 미안해…”


영수는 애써 감추고 있던 감정을 토해내며 절규했다.


“하하하, 여보 그래서 우는 거예요? 박영수 귀엽다, 귀여워.”


수연은 대수롭지 않은 듯 호탕하게 웃었다. 영수는 예상치 못한 수연의 반응에 얼떨떨했다.


“웃어서, 미안해요. 예전 생각도 나고, 우는 당신이 너무 귀여워서요. 그거 기억나요? 예전에도 우리 전재산 다 잃었잖아요. 이사한다고 보증금 보증금, 부동산 사기당해 가지고 하하하. 돈은 우리랑 인연이 아닌가 봐요.” 그러나 그녀의 눈에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 그랬었지, 그러니까 그때는 내가 좀 꺼림칙하다고 했잖아…” 영수는 숨 가쁘게 울면서도 수연과 함께한 과거를 떠올리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는 우리 갈 곳 없어서 몇 주씩이나 찜질방에서 지내면서도 서로 바보 같이 웃었잖아요. 머리에 계란 깨고. 지금은 이렇게 따듯한 집도 있는데 뭘요.”


“미안해… 미안해…”


“아이, 그 미안하단 말 좀 그만해요. 나는 돈 하나도 없어도 당신이 곁에 있으면 행복한데요. 당신도 그렇죠?”


“응.”


수연의 따듯한 목소리에 그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땅을 치고 울었다.


“그럼 됐어요. 빨리 집으로 오세요. 놀림받고 싶지 않음 코 잘 닦고 오시고요. 뭐 먹고 싶어요. 큰 아기씨?”


수연은 영수를 위해 최대한 아무런 일도 아니란 듯이 말했다. 그들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 아픔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하고 걱정하는 마음 때문에 겪는 고통이었다.


수연은 영수를 위해 늦은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영수는 비틀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왔지만, 도무지 수연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그는 식탁으로 향하지 않고 소파에 앉아 천장을 바라보며 흐느꼈다.


“우리는 언제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저에게 미안해하지 마세요. 당신이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해요.”


영수는 수연 덕분에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었다. 비록 돈을 잃었지만, 그녀의 사랑과 지지가 여전히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꼈다.


이후 영수는 경찰서에 사기 사건을 신고하고, 관련 자료를 제출하며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사기꾼들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영수는 자신의 실수로 인해 수연과 어려움에 처하게 된 것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후회했다. 하지만 수연의 변함없는 사랑 덕분에 그는 조금씩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아침, 영수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힘들었다. 식탁에 앉아  아침 식사를 먹으며 머리가 무겁고 어지럽다고 느꼈다. “영수 씨, 오늘 좀 쉬는 게 어때요?” 수연의 말에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신문을 들춰보았다. 구인구직란을 살피던 중이었다.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그러나 그의 상태는 점점 심각해졌다. 갑자기 오른쪽 팔이 저리기 시작했고, 눈앞이 흐려졌다.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그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바닥에 쓰러졌다.


수연은 쿵하는 소리에 놀라 부엌에서 달려 나왔다. 그녀는 쓰러진 영수를 발견하고 그의 몸을 흔들었지만, 반응이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구급차를 불렀다. “제발 빨리 와주세요! 제 남편이 쓰러졌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구급차가 도착하기 전까지 그녀는 영수의 손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병원으로 긴급 이송된 영수는 곧바로 수술실로 옮겨졌다. 뇌졸중이었다. 그가 수술실 안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사이 수연은 복도에서 초조하게 걸음을 옮기며 기도했다. “제발, 남편을 살려주세요. 살려만 주신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게요. 제발요.” 몇 시간 후, 의사가 다가왔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오른쪽 몸 전체와 왼쪽 몸의 일부가 마비되었습니다. 회복 가능성은 장담드리기 어렵습니다.” 수연의 마음은 혼란과 절망으로 가득 찼다.


수술 후 중환자실 첫 면회 시간이 다가왔다. 수연은 복잡한 마음으로 영수의 손을 잡았다. 흐느끼는 어깨 위로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손등 위로 서러움이 흘러내렸다. 수연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병간호와 함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녀는 오랜 시간 주부로서 가정을 돌보았기 때문에 생계를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이나 자신의 삶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수술실에 들어간 영수를 위해 기도하던 때가 떠올랐다. 살려만 주신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던 다짐이었다.




수연은 영수가 살아 있음에 감사를 느끼며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다양한 일을 시도했다. 아침에는 시장에서 반찬을 팔고, 저녁에는 세탁소에서 일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장기적인 생계를 보장해주지 못했다. 중년 여성으로서 노동 시장에서 새로운 기회를 잡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계속해서 더해지는 좌절로 우울증까지 생겼다. 그러던 중 한 건설 현장에서 페인트공으로 일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처음 현장에 도착했을 때, 낯설고 두려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거칠고 무거운 페인트 통과 붓을 들고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그녀에게 생소했다. 그러나 자신과 영수를 위해 이 일을 해내야 한다는 결심을 굳혔다. 고된 노동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버텼다. 아침마다 공사 현장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부담이 가득했다. 서늘한 공기 속에서 자신을 다잡으며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초반에는 페인트 칠이 서툴러 어려움을 겪었다. 붓질이 고르지 않아 페인트가 뚝뚝 떨어지기도 하고, 페인트 통을 통째로 엎는 실수도 있었다. 작업 후에 몸이 쑤셔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러나 조금씩 붓질이 손에 익어가면서 점점 더 능숙해졌다.


수연은 붓을 쥐고 색을 칠하는 과정에서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붓이 벽을 스치는 느낌과 색이 채워지는 광경은 그녀에게 묘한 위안을 주었다. 이 일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경험하고, 그 존재 가치에 대한 확신까지 얻었다. ‘나도 할 수 있어,’ 그녀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동안 자신의 생계를 책임진 남편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퇴근하고 돌아가 편안히 잠든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과 동료들의 격려는 그녀에게 큰 힘이 되었다.


어느 날, 수연은 작업 도중 쉬는 시간에 남는 페인트로 작게 낙서를 했다. 손에 든 붓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자신만의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기분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색과 선을 조합하여 무의식적으로 도형과 패턴을 만들어 나갔다.


동료들은 그녀의 낙서를 보고 감탄했다. “이야, 수연 씨 대단하네, 이런 재능이 있는 줄 몰랐네.” 그들의 칭찬에 수연은 처음으로 자신이 가진 예술적 재능을 깨닫게 되었다. 가슴은 설렘으로 가득 찼다.


“남은 페인트 가져가도 돼요?”


“그려, 그렇게 혀. 근데 그건 뭐 할라꼬?”


수연은 말없이 멋쩍게 웃었다.


그녀는 챙겨 온 페인트로 집안 갈라진 타일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갈수록 그녀의 손은 바빠졌다. 방 안은 페인트 냄새로 가득했지만, 마음은 평온했다. 낡은 타일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벗어나 이제는 직접 캔버스를 사서 칠하기 시작했다. 작업의 고단함 속에서도 집으로 돌아와 그림을 그리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감정과 생각을 색과 형태로 표현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그녀는 짙게 몰입했다. 붓이 움직일 때마다 정신은 그림 속에 녹아들었다. 비로소 진정한 자신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꿈과 몽환을 페인트에 섞어 담았다.


완성된 작품들을 소셜 미디어에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자신의 작업을 기록하는 용도였지만, 점차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독창적인 스타일과 감각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페인트공으로 일하면서도 자신의 예술 세계를 확장해 나갔다. 작업 중간중간, 그녀는 자신이 그린 캔버스를 생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 날, 평소처럼 일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그림을 그렸다. 완성한 작품 사진을 소셜 미디어에 올렸다. 그 그림은 더 많은 이의 주목을 받았다. 팔로워 수도 더 늘어났다. 댓글에는 그녀의 그림을 칭찬하는 글이 가득했다. “정말 멋져요!”, “이런 색감은 처음 봐요!”, “다음 작품도 기대할게요.”, “신비로워요.”


그중 특히 그녀의 작품에 깊은 인상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유명 갤러리의 큐레이터였다. 그가 직접 수연에게 연락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김수연 씨. 저는 서디 미술 갤러리의 큐레이터입니다. 작품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전시회를 함께 열어보고 싶습니다.”


“저는 그냥 페인트공일뿐인데요… 미술 같은 건 잘 모르는데…”


“하하, 이 땅에 미술 하는 사람은 많지만, 세상 사람들이 진정 원하는 건 미술이 아니에요.”


“네?”


“예술이죠.”


수연은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한쪽으로 까딱했다.


“수연 씨의 작품은 예술 그 자체로 와닿아요. SNS에서 많은 이가 열광하는 이유도 그 독특한 예술성 때문이죠. 개인전, 준비합시다.”


“개… 개인전이요? 정말요?”


수연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재차 물었다. 큐레이터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줘야죠. 진짜 예술.”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은 그녀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모든 과정이 생소했다. 큐레이터와 전시 관련자들은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세심하게 일러주며 도움을 주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 또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자신의 일처럼 발 벗고 나섰다. 여전히 몸이 불편한 영수는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에게 쓰는 신경은 줄이고, 전시회에 더 집중해. 당신이 정말 자랑스럽고, 고마워.” 그의 얼굴도 마비되어 있어 말이 어눌했다. 그는 힘겹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수연은 남편의 격려에 더욱 힘이 났다.


전시회 날이 되었다. 수연은 긴장된 마음으로 전시장에 들어섰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온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느껴졌다. 그러나 전시장에서 자신의 작품을 보며 감탄하는 사람들을 보자 금세 안심했다. 관람객들은 그녀의 작품에 빠져들었다. “이 작품의 입체감과 색감이 정말 인상적이에요. 작가님께서는 어떤 생각으로 이 그림을 그리셨나요?” 한 사람이 다가와 물었다. ‘작… 작가…?’ 수연은 잠시 멈춰서 작품을 바라보았다. “이 그림은 제가 느꼈던 절망과 희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색과 선이 복잡한 제 감정을 담고 있죠.” 질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깊은 감명을 받은 듯했다. “그 감정이 그대로 전해지네요. 정말 아름다워요.” 수연은 처음으로 자신이 진정한 화가가 되었음을 느꼈다. 가슴속에서 무엇인가 커다란 응어리가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전시회가 끝난 후, 수연은 많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특히, 한 유명 예술 평론가가 인터뷰를 요청했다. “수연 씨의 작품에는 특별한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예술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수연은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저는 원래 페인트 공으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어요. 그런데 작업을 하면서, 제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다 보니 이렇게까지 오게 되었죠.”


인터뷰 기사가 발행된 후, 그녀의 이름은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여러 갤러리와 전시회에서 초청이 이어졌고, 더욱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영수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장 소중히 여겼다. 영수는 그녀에게 최고의 조력자였고, 그녀의 성공을 누구보다 기뻐했다.




수연은 더 큰 도전에 나섰다. 그녀는 자신만의 화풍을 확립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보았다. 어느 날, 그녀는 벽화 작업을 제안받았다. 대형 빌딩의 벽면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었다.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었지만, 그녀의 작품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였다.


역시나 벽화 작업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끈기와 열정으로 작업에 임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응원했다. “정말 멋진 작품이에요! 완성되면 동네가 더 밝아질 것 같아요.” 벽화가 그려지는 빌딩 근처의 주민들이 나와서 그녀를 지지하며, 틈틈이 간식을 챙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순조롭게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수연이 페인트 공으로 일하면서 화가로서의 명성을 쌓아가는 동안, 그녀 주위에는 여러 사람들의 시선이 따랐다. 대부분의 동료들은 그녀를 응원했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았다. 특히, 그녀를 질투하던 동료 안유진은 그녀의 성공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수연과 유진은 처음에는 좋은 관계였다. 함께 현장에서 일하며 고충을 나누고, 때로는 작업 후에 함께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수연이 예술적 재능을 발견하고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유진의 마음속에는 질투가 싹트기 시작했다.


유진은 항상 자신이 더 우수하다고 생각해 왔다. 수연이 자신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저 여자보다 내가 더 오래, 더 많이 노력했는데, 왜 저 여자만!!!… 불공평 해.’ 유진의 열등감과 질투심은 그녀의 뼛속까지 자리 잡았다.


수연이 벽화 작업을 제안받았을 때, 유진은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수연을 돕기로 했다. “수연 씨, 정말 대단해요. 이렇게 큰 프로젝트를 맡다니. 제가 항상 곁에서 도와줄게요.” 유진의 말에 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마워했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벽화 작업이 계속되며, 수연은 높은 곳에서 작업을 해야 했다. 그녀는 새벽부터 현장에 나가 밧줄에 의지해 벽화를 그렸다. 그 열정과 끈기는 주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동이 트고, 태양이 정점에 이르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했다.


유진은 수연을 훼방 놓기로 결심했다.


수연이 높은 곳에서 작업을 하고 있을 때, 페인트를 매달아 놓은 밧줄이 끊어지면서 그동안 작업해 온 작업물이 페인트로 뒤덮였다. 유진이 일부러 밧줄이 쉽게 끊어지도록 살짝 잘라놓은 것이었다.


수연은 망가진 작업물을 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켜보던 사람들도 놀라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깊은 절망이 다시 한번 그녀의 마음을 찢는 듯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붓을 내려놓으려 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응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유진은 그런 반응에 당황했다.


수연의 손이 떨렸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허벅지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사람들은 더 크게 외쳤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붓을 꽉 쥐고, 자신을 응원하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와!!!”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수연은 신속하게 움직이며 페인트가 흘러내린 자국들을 이용해 새로운 그림을 그려 나갔다. 페인트가 떨어진 자리를 중심으로 새로운 형태와 색을 조합했다. 모두가 그녀의 재빠른 대처능력과 창의력에 감탄했다. 다시 한번 좌절을 진정한 예술로 승화시켰다.


벽화 작업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녀는 더 많은 대중에게 사랑받는 예술가로 성장했다. 예술적 성공의 여정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남편 영수의 회복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벽화 작업이 끝나 많은 보수를 받게 된 수연은 영수를 데리고 유명한 재활치료센터로 향했다. 치료 비용이 아주 비싸고, 연예인과 정치인의 가족들이 자주 다니는 곳으로, 그녀가 페인트공이었을 때는 꿈도 꾸지 못했던 곳이다. 병원에서는 영수의 재활치료를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기로 했다.


첫날, 치료실에 들어선 수연과 영수는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마음이었다. 치료사와 관계자들은 환한 미소로 그들을 맞이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들도 많이 보였다. “영수 씨, 이제부터 조금씩 나아질 겁니다. 처음엔 어렵겠지만, 이겨낼 수 있어요.” 치료사의 말에 영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지를 다졌다.


재활치료는 생각보다 더 힘든 과정이었다. 영수는 자신의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에 다시금 좌절을 경험했다. 치료사는 그의 다리를 부드럽게 움직이며 천천히 근육을 풀어주었다. “천천히 하세요, 영수 씨. 천천히 딱 한 걸음만 나아가면 됩니다.” 영수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온몸에 고통이 스쳤다. 수연이 곁에서 차분히 그를 지켜보았다. 수연의 눈빛에서 사랑과 지지를 느끼며 조금씩 자신감을 되찾았다.


몇 달이 지나, 재활치료실에서 영수는 처음으로 혼자 걸음을 내디뎠다. 비록 몇 발자국이었지만, 그에게는 큰 성취였다. 영수는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조금씩 나아가자.” 수연은 눈물을 삼키며 박수를 보냈다.


영수는 조금씩 근력을 회복해 나갔고, 점차 스스로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되었다. 재활치료는 신체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영수는 심리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자주 자신이 무력하다고 느꼈고, 가족에게 짐이 된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수연은 이런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앞에서 힘든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영수는 침대에 누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저의 큰 버팀목이에요.” 수연은 그의 손을 잡아 끌어당기며 말했다.


“미안해…”


“그런 말 말아요.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알아요.”


수연의 말에도 영수는 아무런 대답 없이 숨을 죽였다.


“저를 사랑해 주신 그 모든 날을 기억해요. 제가 나갈 때면 항상 제 신발을 꺼내어 신기 편한 방향으로 놓아주셨죠. 자주 넘어지는 저를 위해 항상 화장실 바닥에 물기를 닦아 놓으셨잖아요. 일주일에 한 번 제 발을 씻겨주신 일도요. 30년 넘게 제 걸음을 돌보셨어요. 이제는 제게 당신 걸음을 보살필 기회가 온 거죠. 당신도 제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잊지 말아요. 당신이 저를 향해 가져야 할 감정은 그것뿐이에요.”


결국 영수는 마음속 깊이 감추고 억눌러왔던 아픔을 쏟아내며 울었다.


시간이 흘러, 영수는 점차 더 먼 거리를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집 근처 공원에서 수연과 함께 산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산책 중에 영수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당신은 최고의 예술가야.



저는 어디까지나 당신을 위한 페인트공일 뿐이에요.



유독 공기가 맑고, 공원 바닥은 푹신하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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