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나는 열심히 살면 삶의 의미도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줄 알았다.
맡은 일을 책임 있게 해내고, 쉽게 흔들리지 않고,
주어진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하면 언젠가는 내 삶에도 단단한 중심이 생길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사람은 성실하게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남이 정해준 기준을 잘 수행하는 것만으로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겉으로는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마음 한쪽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가 밀려오는 순간이 있다.
분명 열심히 살았고, 쉽게 포기하지 않았고, 나름의 책임도 다해왔는데 어딘가 비어 있는 느낌.
버티고는 있는데, 살아 있다는 감각은 희미해지는 느낌.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나만의 문제인 줄 알았다.
내가 예민해서 그런가, 내가 지쳐서 그런가, 혹은 내가 충분히 단단하지 못해서 그런가 생각했다.
하지만 조직을 운영하고 사람들과 오래 일하다 보니, 비슷한 말을 반복해서 듣게 되었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바쁘게 사는데, 재미가 없어요.”
“예전보다 더 책임지고 있는데, 왜 점점 공허해지는지 모르겠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각자 다른 고민처럼 보였다.
누구는 일의 방향을 고민했고, 누구는 성장의 정체를 말했고, 누구는 관계와 역할 사이에서 지쳐 있었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결국 같은 질문으로 이어질 때가 많았다.
나는 지금 정말 내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의미 있게 버티고 있는가, 아니면 의미를 잃은 채 익숙하게 버티고만 있는가.
그때부터 나는 허무를 조금 다르게 보게 되었다.
허무는 특별히 약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감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 책임감 있게 버텨온 사람들,
자기 몫을 다하려고 애써온 사람들에게 더 깊이 찾아오는 감정일 수도 있었다.
삶을 대충 살아온 사람의 공백이 아니라, 오래 버틴 사람이 마침내 마주하게 되는 질문일 수도 있었다.
그 무렵 니체라는 이름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면 ‘초인’, 그리고 ‘위버멘쉬’라는 말이 먼저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 말이 강한 사람, 특별한 사람, 남보다 높은 사람을 뜻하는 줄 알았다.
어떤 약함도 보이지 않고,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밀고 가는 압도적인 인간을 떠올렸다.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니, 니체가 말한 초인은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남보다 우월한 인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기존의 가치가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자기 삶의 기준을 세울 수 있는 인간을 말하고 있었다.
누가 옳다고 말해준 기준이 아니라, 남들이 박수치는 방향이 아니라, 스스로 묻고 스스로 감당하며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 인간.
내가 붙들게 된 위버멘쉬는 그런 존재에 가까웠다.
니체는 허무를 단순한 절망으로만 보지 않았다.
오히려 허무는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믿어온 가치들이 흔들리고, 더는 예전의 방식대로 살 수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 사람은 비로소 자기 삶의 질문을 진짜로 시작하게 된다.
돌아보면 나 역시 그런 시간을 지나왔다.
예전의 나는 의미를 찾기보다 역할을 수행하는 데 익숙했다.
해야 할 일을 해내는 것, 책임을 다하는 것, 기대한 만큼 버텨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 삶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시간 덕분에 나는 단단해졌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질문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누구의 기준으로 살고 있는가.
내가 정말 붙들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나는 잘 버티고 있는가, 아니면 잘 살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들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나는 허무를 두려워하기보다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더 이상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았다.
왜 조직 안에서도 가장 성실한 사람이 가장 깊은 허무를 호소하는 일이 반복되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공허함은 단지 무너짐이 아니었다.
그동안 빌려 살던 의미가 더는 나를 지탱하지 못한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러니 허무는 끝이 아니라, 이제는 내 삶의 의미를 내가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호출에 가까웠다.
나는 초인을 완성된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초인은 어떤 결과가 아니라 방향에 가깝다.
오늘의 나를 절대화하지 않고, 어제의 나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사람.
나는 감히 내가 초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고는 말하고 싶다.
내게 그 길은 삶을 미워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니체가 말한 운명애는 좋은 일만 사랑하는 태도가 아니다.
내가 지나온 실패와 고통, 설명하기 어려웠던 외로움과 상실까지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그것은 체념이 아니라 긍정이다.
‘이런 삶은 싫다’고 밀어내는 대신, ‘이 또한 내 삶이었다’고 끌어안는 힘이다.
그리고 그다음에 필요한 것이 힘에의 의지라고 생각한다.
이 말을 흔히 지배나 권력으로 오해하지만, 내가 이해하는 힘에의 의지는 남을 누르는 힘이 아니다.
무너진 자리에서도 다시 자기 삶을 만들어내려는 힘, 지금의 나에 안주하지 않고 한 번 더 자신을 넘어서는 힘, 고통을 핑계로 멈추지 않고 그 고통을 재료로 바꾸는 힘이다.
그래서 위버멘쉬는 화려한 존재가 아니라, 삶을 다시 해석하는 사람이다.
남이 준 답을 반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의 질문을 끝까지 붙드는 사람이다.
상처 때문에 삶을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상처를 통과해 더 넓은 긍정으로 가는 사람이다.
나는 이제 조금씩 알 것 같다.
초인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의 책임을 더 깊이 떠안는 사람이라는 것을.
누가 정해준 선과 악을 그대로 따라 사는 대신, 나는 어떤 가치를 따라 살 것인지 스스로 묻고, 그 질문에 삶으로 답하려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이 질문을 계속 붙들고 싶다.
나는 왜 초인이라는 말을 붙들게 되었는가.
왜 허무를 단지 어둠으로만 보지 않게 되었는가.
왜 이제는 주어진 의미를 잘 수행하는 사람을 넘어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아마 이 질문들을 따라가다 보면 니체를 조금 더 깊이 읽게 될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나 자신도 조금 더 분명하게 읽게 된다는 점일지 모른다.
어쩌면 초인은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삶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냉소로 주저앉지 않고, 다시 자기 삶을 붙들어보려는 사람.
누가 답을 주지 않아도 끝내 자기 기준을 세워보려는 사람.
어제보다 조금 더 진실한 자신으로 살아보려는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이미 위버멘쉬를 향해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