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게서 위대한 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다리라는 점이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내게 오래 남은 것은 ‘위대함’이라는 말보다 ‘다리’라는 말이었다.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어디론가 건너가는 존재라는 뜻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지금의 흔들림이 끝이 아닐 수도 있다.
지금의 공허가 실패의 증거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무너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나를 지나 다른 삶의 기준으로 건너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대개 허무를 좋지 않은 감정으로 여긴다.
의욕이 떨어지고, 하던 일이 갑자기 의미 없게 느껴지고, 관계와 성취도 예전만큼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때 우리는 먼저 스스로를 의심한다.
왜 이렇게 공허하지.
분명 열심히 살고 있는데 왜 이럴까.
내가 뭔가 잘못 살고 있는 걸까.
이 질문 앞에서 사람은 보통 두 가지 방식으로 반응한다.
하나는 더 바빠지는 것이다. 생각할 틈이 없도록 일정을 채우고,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다시 자신을 밀어붙인다.
다른 하나는 멈춰버리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지금까지 해오던 일마저 낯설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허무는 단지 피해야 할 감정만은 아니다.
지금까지 나를 움직여온 가치와 기준이 더는 충분하지 않다는 신호일 수 있다.
삶이 망가졌다는 증거가 아니라, 예전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알림에 가깝다.
생각해보면 허무는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오지 않는다.
특히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에게 허무가 찾아올 때는 더욱 그렇다.
해야 할 일을 해왔고, 기대받은 역할을 감당해왔고, 자기 몫도 쉽게 놓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충분히 잘 버티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질문이 올라온다.
그래서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이었나.
나는 내 기준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남이 정한 기준을 잘 수행하고 있는가.
나는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잘 버티고 있는가.
나는 이 질문이 시작되는 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은 그 순간을 실패처럼 느낀다.
잘해오던 사람이 갑자기 흔들리면, 스스로 약해진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반대일 수도 있다.
이전에는 묻지 못했던 질문을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일 수 있다.
그렇다면 허무는 무너짐이라기보다 깨어남에 가깝다.
이 일은 개인의 내면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조직을 운영하다 보면 비슷한 장면을 반복해서 마주하게 된다.
겉으로 보기엔 잘해내고 있는 사람, 주변에서도 인정받는 사람, 책임감과 성실함이 분명한 사람이 어느 날 조용히 말한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바쁘게 사는데, 재미가 없어요.”
“힘든 것보다 더 어려운 건, 점점 의미가 안 느껴진다는 겁니다.”
이런 말은 대개 쉽게 포기하는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 버틴 사람, 자기 몫을 끝까지 책임지려는 사람,
함부로 무너지지 않으려는 사람에게서 자주 나온다.
그래서 나는 허무를 단순한 나약함으로 보지 않게 되었다.
허무는 책임을 피한 사람에게 찾아오는 감정보다,
책임을 오래 감당해온 사람에게 뒤늦게 찾아오는 질문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생각보다 깊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아마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집중한 채 살아왔기 때문일지 모른다.
좋은 학교, 좋은 회사, 좋은 성과, 좋은 평가, 좋은 역할.
이런 것들은 분명 삶에서 중요하다.
문제는 그것들이 틀린 기준이라는 데 있지 않다.
그 기준만으로는 사람을 끝까지 살게 하지는 못한다는 데 있다.
사회적으로는 성장할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충분히 잘 살고 있다고 평가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곧바로 내 삶의 의미가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람은 어느 순간 멈춰 서게 된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몸과 마음이 먼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니체가 허무를 중요하게 본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기존의 가치가 흔들릴 때 사람은 두려워한다.
분명하다고 믿었던 기준이 낯설어지고, 당연하다고 여겼던 목표가 더 이상 나를 움직이지 못한다.
하지만 바로 그때 비로소 진짜 질문이 시작된다.
나는 정말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누구의 기준으로 나를 평가해왔는가.
나는 앞으로도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고 싶은가.
허무는 이 질문을 열어젖히는 감정이다.
그러니 허무의 본질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선언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의미 체계가 더 이상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자각이다.
그리고 그 자각은 불편하지만, 아주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사람은 익숙한 기준이 잘 작동하는 동안에는 자기 삶을 새롭게 만들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당연하다고 믿는 길이 계속 유효한 동안에는, 왜 이 길을 가는지 끝까지 묻지 않는다.
그러나 허무는 그 익숙한 껍질을 깨뜨린다.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이제는 다른 기준이 필요한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질문 앞에 우리를 세운다.
물론 이 말이 허무를 낭만화하자는 뜻은 아니다.
허무는 실제로 아프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자기 확신을 흔들고, 지금까지 해온 시간을 통째로 의심하게 만든다.
그러니 그 시간을 가볍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아픔이 반드시 파괴로만 끝나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허무를 통과하는 방식에 따라 사람은 더 냉소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더 진실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을 무의미하다고 비웃는 쪽으로 갈 수도 있고,
이제는 정말 내 삶의 기준을 다시 세워야겠다고 결심하는 쪽으로 갈 수도 있다.
니체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그 갈림길에 있다.
무너진 뒤에, 너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
그래서 허무 이후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회복이 아니다.
예전처럼 돌아가는 것이 답이 아닐 수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전의 기준이 왜 더 이상 나를 살게 하지 못하는지 이해하고, 이제는 어떤 가치를 중심에 두고 살아갈 것인지 다시 묻는 일이다.
그 질문이 시작될 때, 허무는 비로소 새로운 삶의 입구가 된다.
허무를 마주하는 시간은 쉽지 않다.
하지만 공허함이 찾아왔을 때, 나는 이제 그것을 무조건 없애야 할 문제로만 여기지는 않게 되었다.
오히려 그 감정이 지금 내 삶에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 먼저 듣고 싶어진다.
그리고 조직 안에서 누군가 비슷한 감정을 말할 때도, 그 사람을 다그치기보다 먼저 생각하게 된다.
이 사람은 지금 무너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더 깊은 삶의 기준을 찾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허무는 우리를 멈춰 세운다.
하지만 모든 멈춤이 퇴보는 아니다.
어떤 멈춤은 방향을 다시 묻기 위해 필요하다.
계속 앞으로 가는 것보다, 왜 앞으로 가고 있는지를 묻는 일이 더 중요해지는 순간이 있다.
허무는 바로 그 질문 앞에 우리를 세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허무는 끝이 아니다.
허무는 오래 빌려 살던 기준이 무너지는 순간이며,
바로 그 자리에서 비로소 나의 삶을 나의 기준으로 다시 써야 한다는 요청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그러니 허무는 공백이 아니라 문턱이다.
무너짐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가장 진실한 시작은 늘 그 문턱에서부터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