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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야 Feb 02. 2023

복수는 내일이나 모레쯤

단편소설

1/ 

  망할 대머리 교수. 정말 죽일 것이다.

  지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지연의 노트북 화면에는 방금 전송된 이메일 내용이 나와있었다. 영어로 된 원문은 한국어로 자동 번역되었다. 

... 당신의 원고가 이번에는 저희 저널에 실리지 않을 것임을 알려드리게 되어 유감입니다...  

  지연이 올해 내내 매달린 논문은 그렇게 거부당한 것이다. 몇 분 멍하게 바라만 보던 지연은 휴대폰 진동소리에 움찔하며 정신을 차렸다. 

  내일 우리 집 와서 청소 좀 해라.

  지연의 지도교수가 보낸 문자였다. 썅! 지연은 단말마를 호탕하게 한번 지르고는, 이윽고 중얼거렸다. 죽일 것이다. 요즘 돈만 있으면 마약도 산다는데, 커피에 펜타닐인가 하는 그걸 잔뜩 타서 먹여버릴 것이다, 기필코. 지연은 다짐했다. 

  2/

  다음 날 아침, 지연은 커피를 두 잔 사러 카페에 왔다. 주말 아침이라 어른, 아이들이 꽤 많아 북적였다. 

  막상 당일이 되니 두려워진 지연은 미리 약국에 들러 변비약을 왕창 샀다. 뭐, 이번엔 살려주지. 그렇지만, 논문을 거부당한 가엾은 대학원생에게 집안일을 시키다니. 복수를 피할 순 없다. 지연은 머릿속으로 골똘히 생각하며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했다.

  "아메리카노 따뜻하게 톨 사이즈 두 잔 맞으시죠? 드시고 가시나요?"

  아침 시간대면 늘 만나는 직원이다. 그녀의 가슴팍 이름표에 'Eiffel'이라고 적혀있다. 

  "아니요. 들고 갈게요. 캐리어도 부탁드려요."

  "네 고객님, 바코드 찍어주세요. 닉네임으로 불러드리겠습니다."

  말 끝에 물결이 따라오는 듯 부드러운 에펠씨. 아이플이라 읽어야 

하나? 여하튼 편안한 분위기의 직원이라 괜히 기분이 좋다. 지연은 커피를 기다리며 진열대의 머그컵을 쳐다봤다. 내가 몇 달을 썼는데, 수정 요구도 아니고 그냥 거부라니. 서양 오랑캐 놈들. 너희 나라 말도 배워서 열심히 적었는데.

  "지연 고객님.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이름과 똑같은 닉네임이 불리자 지연은 생각을 끊고 허둥지둥 커피를 받으러 갔다.         

  "감사합니다." 

  종이 캐리어를 쥐고 돌아서는데, 모르는 아이가 달려왔다. 컵과 아이가 부딪혔다. 안 되는데, 이거 뜨거운 건데. 지연은 컵이 흔들려 쏟아지기 직전에 생각했다. 나도 참 불쌍하다. 지연은 잽싸게 남은 손으로 쏟아지려는 컵을 붙잡았다. 

  "아" 

  붙잡았다가 너무 뜨거워서 놓쳐버렸다. 바닥으로 떨어진 컵에서 커피가 콸콸 쏟아나왔다. 모락모락 김을 뿜으며.

  3/

  슬로모션 같다고 지연은 생각했다. 놓친 컵이 바닥에 떨어지고 팍 터지는 그 순간이 엄청 느리게 보였다. 아, 변비약을 타야 하는데. 새로 사기엔 이번 달 돈이 아슬아슬한데, 어쩐다. 어쩐다... 

  "괜찮으세요?" 

  새된 목소리가 카운터쪽에서 들렸다.  

  "안 다치셨어요? 제가 닦아드릴게요. 잠시만요."

  에펠이 우당탕 달려왔다. 이런 목소리도 낼 줄 아는구나, 지연은 신기해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네. 괜찮, 괜찮아요. 어쩌죠. 바닥이 더러워져서..."

  "괜찮아요 그런건!"

  다급히 말하고 그녀는 지연의 손을 잡고 눈을 바짝 갖다대며 이리저리 쳐다봤다. 정말로 지연은 다치진 않았다. 옷에 조금 튀었을 뿐이다. 

에펠은 안도하며 숨을 폭 내쉬었다. 

  "안 다치셔서 다행이에요. 바닥은 닦으면 되니까 걱정마세요."

  그녀는 총총 걸어가서 대걸레를 가져와 솜씨

좋게 닦았다. 

  "그, 제가 닦을게요."

  지연이 쭈뼛거리며 말했다. 에펠은 대답 대신 

빙긋 웃으며 걸레질을 계속했다. 금세 바닥이 

깨끗해졌다. 지연은 머쓱해하며 컵을 주웠다.

  "감사합니다... 커피는 새로 살게요." 

  "아니에요. 다시 내려드릴게요."

에펠은 한번 더 방긋 웃으며 커피를 내려 주었다. 지연은 입을 작게 벌린 채로 눈을 끔뻑이다가, 너무 감사합니다. 하고 꾸벅 인사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에펠이 웃으며 인사한다. 눈웃음이 반달같네, 지연은 생각했다. 오늘은 환하구나. 

  4/

  그 후로 계속, 지연에게는 좋은 일만 일어났다. 카페 아이 엄마가 달려와서 그녀에게 세탁비를 주고 갔다. 교수 집까지 가는 동안 신호등이 줄곧 초록불이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고 딱 적당한 가을 날씨였고,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그래, 신이 존재하신다면 이정도 밸런스는 맞춰주셔야지. 지연은 생각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와라."

  지연이 벨을 누르자 그녀의 지도교수가 직접 문을 열었다. 어라, 깨끗한데? 집 안은 아주 깨끗해서 청소고 뭐고 할 필요도 없어보였다. 

  "그, 식탁에 좀 앉아있어라. 통화 좀 하고."

  그러고 교수는 서재로 들어갔다. 

  지연은 익숙해져서 자연스레 식탁에 앉았다. 저정도면 양반이지, 논문 첨삭할때 듣도 보도 못한 욕을 얼마나 들었는데. 생각하며 지연은 커피 컵의 뚜껑을 열었다. 준비해온 변비약을 꺼냈다. 

  그래, 복수할테다. 난 잃을 게 없다. 심심하면 집에 불러서 일 시키고, 운전 시키고. 논문 고칠 때 마다 재능이 없다, 멍청하다, 이따위로 쓸거면 데이터는 왜 모은거냐, 공동저자 올릴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넌 내 교수 커리어의 오점이다. 온갖 핍박을 들으면서 쓴 그 논문도 리젝먹었다 이거야. 하루 종일 변기나 붙잡으시지. 

  지연은 골똘히 생각하면서 커피에 변비약을 가득... 넣으려다가 멈췄다. 아, 좋은 하루 보내랬

는데. 지연은 에펠의 얼굴이 떠올랐다. 돈도 안 받고 새로 내려준 커핀데. 으으. 지연은 커피만 바라보며 고민하다가, 약을 한 알만 꺼내어 퐁당 집어넣었다. 휴, 한숨을 내쉬고는 남는 약들을 가방에 쑤셔넣었다.

이윽고 서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지연아."

  "네, 네 교수님."

  교수는 스마트폰을 지연에게 내밀었다. 음식 배달 어플리케이션이 켜져있다. 영문을 몰라 지연은 교수를 쳐다봤다.

  "니 먹고 싶은 거 다 시켜라. 돈 생각 하지 말고."

  "네?"

  "내도 다 겪어봐서 안다."

  교수는 헛기침을 하고는 지연을 마주보고 의자에 앉았다.

  "논문이란게, 원래 여러 번 깨지고 빠꾸먹고... 그래야 되는거다. 눈물도 쏙 빼고, 쪽도 많이 팔려서 죽을 거 같은 그 때 되는거라. 내가 또 도와줄게. 다시 쓰자."

  

  교수는 부끄러운듯 시선을 돌리고는, 지연이 사온 커피잔을 들었다.

  "맛있는 거 먹고 좀 쉬어라. 니는 똑똑해서 다 할 수 있다."

  "교수님"

  지연이 황급히 교수가 쥔 커피잔을 뺏어 콸콸 마셨다. 이번에는 교수가 영문을 몰라 지연을 멍하니 쳐다본다.

  "저, 화장실 좀."

  지연은 눈가를 비비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허, 싱겁기는. 교수가 중얼거렸다.

  

  지연은 다짐했다. 

  복수도 좋지만, 오늘 말고 다음에 하자고. 

  오늘은 날이 하루 종일 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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