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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야 Feb 02. 2023

Ace in the Hof

단편소설

1/

비가 세차게 쏟아진다. 오늘은 다섯 친구들이 만나는 날이다. 


금요일 저녁, 외진 골목의 고깃집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진다.

"많이 무라. 내 오늘 차를 세 대나 팔았다니까!"

다섯 남자가 동그랗게 앉은 불판 테이블에서,  근혁이 큰 소리로 말한다. 190cm가 넘는 거구에, 살이 많이 붙어 하얀 셔츠의 단추를 미처 다 잠그지 못했다. 불룩히 튀어나온 배는 앞치마 밑에서도 꿋꿋이 자기 주장을 하고 있었다. 포마드를 잔뜩 바른 근혁의 머리가 유난히 더 빛나는 듯이 보인 것은 돼지고기의 기름이 튀어서 일까. 근혁은 연신 미소를 띄며 고기를 구웠다.


"이야. 내보다 낫다. 오늘 내는 우리반 학생이 내 차 위에 올라가서 쩜푸했는데, 니한테 새로 사면 되나? 내한테는 눈탱이 안먹일거제?"

옆에 앉은 세진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근혁에게 물었다. 멀리서 봐도 한 눈에 알아볼 풍채를 지닌 근혁과 대비되게, 세진은 흔히 보일 법한 30대 남성 평균의 키와, 조금 마른 체중이다. 도드라져 보이는 광대를 숨겨보려고 커다란 뿔테 안경을 썼지만, 본래 마른 체형의 세진이라 크게 도움은 되지 않는다. 새치가 많아 검은색으로 머리를 염색했지만, 군데군데 흰 머리가 보인다.


"아이, 새끼 말 하는게..." 근혁이 미소를 거두며 살짝 짜증난 듯이 세진을 쳐다본다. 아니다, 오늘은 좋은 날이지. 오랜만에 우리 다섯이 다 모이는 날 아닌가. 근혁은 생각하며 짜증을 거둔다. "내는 다른 딜러들이랑은 다르다. 박리다매, 모르나. 이익은 적어도 사람을 남긴다, 사람을!" 근혁이 웃으면서 크게 말한다.


"그, 그, 그래. 근, 근혁이는 눈탱이, 안 쳐." 세진의 옆에 앉은 지완이 말을 더듬으면서 근혁을 변호한다. 세진보다 더 작고 야위어 왜소한 지완은 턱을 뒤로 끌어당겨 목을 일자로 가다듬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의 거북목으로 돌아와버린다. 지완의 팔다리는 무척 가늘지만, 배는 볼록하다. 펌한 머리는 숱이 부족하여 듬성 듬성 두피가 보인다.


"마, 김지완이. 니는 아직도 말 똑띠 못하나. 사내새끼가 뭐하노? 말을 똑바로 해라 똑바로!" 지완의 옆에 앉은 준철이 고기를 삼키고 지완의 등을 치며 말한다. 준철은 다부진 근육질으로, 입고 있는 티셔츠를 뚫고 대흉근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지완의 세배는 넘을 듯한 굵기의 팔은 티셔츠를 팽팽하게 만든다. 짧고 깔끔히 깎은 머리, 처음부터 끝까지 새까맣게 진한 눈썹, 눈썹 바로 밑에 크고 또렷한 눈빛, 칼같이 각진 턱은 준철의 직업이 경찰, 그것도 형사부 소속이라는 사실에 확신을 준다.


"에이, 그럴 수도 있지. 지완이는 그런게 매력이잖아. 그 뭐라더라, 음.. 찐따미?" 준철의 옆에 앉은 우빈이 특유의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농을 던진다. 열심히 고기를 굽는 근혁과 본인 지완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명이 껄껄 웃는다. 우빈은 동그랗게 앉은 5명 중에서 눈에 띄게 잘 생긴, 곱상한 얼굴로 존재감을 보였다. 180센티미터 정도의 큰 키, 보기 좋게 잔근육이 붙은 몸매, 늘 남들을 웃게 하는 재치있는 성격으로 5명이 처음 알게된 고등학생 시절부터 늘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 우빈은 스스로도 '내 목소리만 더 굵었어도 여자를 3배는 더 만났을 거다' 라고 했는데, 나머지 친구들은 (지완을 제외하고) 부러워하면서도 '그래, 이 모기 새끼야' 라며 우빈을 놀리곤 했다. 우빈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호감가는 외견과 특유의 말솜씨로 입소문을 타서 손님들이 그의 카페에 꾸준히 오고 있다.


"그, 그만해. 고기나 먹,먹자." 지완이 얼굴이 붉어져서 말한다. 

"그래, 고기 더 먹어라. 사장님, 여기 삼겹살 10인분 추가요!" 근혁이 외쳤다. 근혁은 유일하게 지완을 놀리지 않는 한 사람이었다. 불편함을 느껴서인지, 큰 소리로 고기를 추가 주문한다.

"근혁이 목소리 큰 건 여전하네. 니도 저렇게 해라, 지완아." 세진이 웃으면서 지완의 잔에 맥주를 따른다. 지완은 멋쩍게 웃으며 맥주를 받는다.

"으어, 취한다. 오늘 진짜 운이 좋다. 어째 오늘은 큰 건이 하나도 안 들어 오더라고. 몇 달만에 이리 퇴근했는지 모르겠다." 준철이 단숨에 맥주잔을 비우고 말한다. 푸우, 하고 큰 숨을 내뱉은 준철은 연신 두 팔에 힘을 주며 근육을 긴장시킨다. 

"어, 그런 말 하면 안되는데. 우리 카페도 '오늘 한가하네~' 말 내뱉으면 그때 손님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라고." 우빈이 웃음기를 머금고 준철에게 대답한다.

"니는 임마, 얼굴이 곱상하니까 니 볼라고 오는거겠지. 임마는 어떻게 서른이 넘어도 이래 뽀얗냐? 신기하다 참." 준철이 우빈을 바라보며 말한다. 우빈은 흐흐 웃으며, 그런가. 하고 중얼거린다.

"우,우리 약국도 그래. 사,사람없다고, 직원들이랑, 이야기하면, 갑,갑자기 손님들, 몰려와..." 지완이 더듬으며 말했다. 

"아, 말 좀 똑바로 하라니까!" 준철이 지완의 뒤통수를 때리며 큰소리쳤다. 준철은 이미 꽤 취한 듯, 얼굴이 조금 붉어져있다. 

"어허, 애를 때리면 쓰나." 세진이 웃으면서 짐짓 걱정하는 투로 말한다. 세진은 재미있는 듯 지완의 표정을 쳐다본다.

"야, 그만해라. 오랜만에 만났는데." 근혁이 준철을 바라보며 말한다.

"흐흐, 지완이가 놀리는 재미는 있긴 해." 우빈이 고기를 한 점 먹으며 웃는다. "괜찮지 지완?"

지완은 얼굴이 살짝 붉어져서, 웃는다. 세진, 우빈, 준철도 따라 웃는다.


2/ 

빗소리가 더 거세진다. 시간은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워낙 구석진 곳에 있는 고기집이라, 손님은 근혁, 지완, 세진, 우빈, 준철 5명만 남았다. 비는 그칠 생각을 않는다.

"요새 이, 소확횡 이라는게 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횡령. 흐흐, 아침 일찍 탕비실 가서 믹스커피를 3개 한번에 붓는거라." 근혁이 거나하게 취해 벌게진 얼굴로 말한다. "그러면 이게 맛이 죽이거든? 이게 소확행이면서 소확횡인거다." 

"크크, 귀엽네." 우빈이 웃으며 답한다. 우빈은 술을 아무리 마셔도 얼굴에 티가 나지 않아, 친구들 사이에서 '선수'라고 불렸다. 하지만 우빈도 취한 듯, 발음이 살짝 꼬인다. "그런걸 배덕감이라고 하지. 하면 안되는 일을 할 때 느끼는 쾌감." 

"뭐? 배득... 뭐라고? 점마 저거 취했네." 근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한다. 

"아니거든. 배덕감 이라고, 사전에도 있는 말이야." 우빈이 킬킬거리며 말을 이어간다. "나는 어땠냐면... 알바들 월급 줄 때, 일부러 월급을 늦게 주는거야. 착한 애들은 하루, 이틀 기다리기만 하고 말을 못하다가, 쭈뼛거리면서 '사장님, 저, 월급..' 이러면서 말을 하거든? 그러면 처음에는 '응, 월급이 왜?' 하고 시치미를 떼. 그러면 더 목소리가 기어가면서 "안 주셨어요...' 하면 그제서야 '헉 정말? 월급이 입금 안됐어? 미안, 내가 지금 바로 확인해볼게.' 라고 하는거야."

근혁은 한심한 눈빛으로 우빈을 쳐다본다. 우빈은 아랑곳않고 말한다. 

"그러고 시치미 뚝 떼면서 '어우, 정말 미안. 방금 내가 입금했으니까 확인해 봐.' 라고 해주는거야. 그러면 애가 안도감에 얼굴이 풀어지는걸 보는게, 이게 꽤 재미라고. 흐흐." 우빈이 말한다. "물론 똑부러지고 기 쎈 애들한텐 안해. 골치 아파지거든. 적당히 물렁하고 착해빠진 애들한테만 하는거야."

"봐라, 저래 기생오래비 같이 생겨갖고 딱 어울리는 짓을 하네. 니는 임마 사내새끼가..." 준철이 고개를 푹 숙인채로 말한다. 준철은 만취하여 얼굴, 팔, 손, 모두 새빨갛다. 

"음침한 놈. 술이나 더 먹어라." 근혁이 우빈에게 맥주를 따라준다. 우빈은 웃으면서 한잔 더 마신다.

"나,나도. 그런거 있어. 배,배덕감. 실험용 쥐를 사서, 우리 약국 약을 먹이는데, 이걸 술이랑 같이 먹이면, 거,거,거품을 물고..." 지완이 말을 다 하기 전에, 세진이 테이블을 맥주잔으로 쾅 친다.


"너네, 진짜 배덕감이 뭔지 아냐?" 세진이 돌연 목소리를 깔고 말한다.

"뭔데?" 준철이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세진을 바라본다.

"갑자기 가오를 잡고 있노, 뭔데?" 근혁도 세진을 바라보며 대답한다.

"내가 중학교에 근무하잖아." 세진이 히죽거리며 말한다. 

"여자애들 보면 졸라 살벌하게 세력다툼을 하거든? 특히 중학생들은, 여자애들이 겉으로는 웃으면서 지내다가도 다음날 친구 하나 왕따시키는게 비일비재해. 카톡이나 인스타로 '이 년 남자애들한테 꼬리치고 다닌다. 더럽다.' 이런 소문이 나면 그 여자애는 끝인거야. 완전 나가리지."  근혁은 눈썹을 찡그리며 고기를 굽는다. 지완은 자기 말이 끊긴것이 못마땅했지만, 참고 이야기를 듣는다. 우빈과 준철은 잠자코 듣는다.

"그렇게 하루 아침에 왕따가 된 여자애는, 얼굴에서 다 티가 나. 세상 어둡고 음침하게 다니거든? 그럼 내가 한 이틀 정도 지켜보다가, 물어보는거야. '너 무슨 일 있어? 요새 표정이 안 좋은데. 걱정된다.' 그러면 여자애는 다 말하는거야. '친구들이 갑자기 날 왕따시킨다. 헛소문을 퍼뜨린다. 남자애들이랑 이야기도 별로 안하는데, 걸레라고 소문이 돈다.' 그러면 나는 안타까운척하면서 듣고, 이렇게 말해. 선생님이 도와줄게. 수업 마치고 상담실로 올래? 하면 열에 일곱은 진짜로 와." 세진이 목소리를 낮춰 말한다.

"그러면서 이제 이야기를 들어주는거야. 그랬구나, 힘들었겠네, 고생했지? 이 말만 반복해주면 걔는 이제, 펑펑 울면서 완전 무장해제야. 그러면 이제 옆자리로 가서 앉아. 그러고 손을 살짝 잡고, 어깨도 쓰다듬는거지. 고생 많았다고, 속삭이면서 살짝 끌어안으면, 크흐, 애가 놀라서 튀어오르거든? 그때 귀에 대고, '움직이면 니가 지금 걔네 뒷담한거 다 알려준다. 녹음했어.' 라고 해. 그러면 애가 몸을 떠는 게, 진짜 맛이 오르는데..."


세진이 말을 멈춘다. 근혁은 고기 굽는 것을 멈춘다. 지완은 빤히 세진을 쳐다본다. 준철은 팔짱을 낀 채로, 세진을 쳐다본다. 우빈은 나머지를 쳐다보며 눈치를 살핀다. 


말이 없다. 


아무도. 


조용하다.


"뭘 봐." 세진이 옆에 앉은 지완에게 말한다. 

지완은 답이 없다. 조용히. 쳐다본다. 경멸을 담아.

"이 새끼가." 세진이 지완을 쳐다본다. "대답 안하냐?"

지완은 그래도 아무 말 없이 지완을 빤히 쳐다본다. 세진이 손을 뻗어 지완의 멱살을 잡는다. "이 씨발, 말더듬이 새끼야. 뭘 그리 쳐다보는데."

"야, 야! 그만해!' 우빈이 놀라서 말리려한다. 근혁도 일어서서 말리려한다. 지완은 킬킬 웃는다. 준철은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다. 근혁과 우빈이 세진을 지완에게서 떼어 낸다.

"선,선생이라는 새끼가, 어린애를, 성,성,성추행, 한다고." 지완이 킬킬거리며 말한다. 세진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맥주병을 오른손에 쥔다. 


"내려 놔!" 준철이 거세게 소리친다. 근혁, 우빈, 세진 모두 깜짝 놀라 준철을 바라본다. 


"담배." 준철이 말한다. "담배 태우고 오자." 준철이 일어서서는 세진의 왼팔을 꽉 쥐고 가게 밖으로 나선다. 세진은 말 없이 끌려간다. 우빈과 근혁은 불안함을 느끼며 나선다. "지완, 고기 먹고 있어." 근혁이 지완에게 말하며 가게를 나갔다. 지완은 호주머니를 뒤적이며 킬킬 웃는다.


3/ 

비는 아직도 거세게 내린다.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퍼붓는다. 지붕 밖으로 나가면 몇 초만에 흠뻑 젖어버릴 만한 폭우다.


"진짜냐." 준철이 묻는다.

"진짜면 어쩌게." 세진이 노려보며 답한다. 우빈과 근혁은 안절부절하며 쳐다만 본다.

"진짜면 뭐..." 준철이 말꼬리를 흐린다. 

척, 척, 몇 걸음 걸어서 세진 바로 앞에 선다. 

준철의 커다란 등이 천천히 오르내린다. 

팽팽한 대흉근과 이두근은 술을 마셔도 그 크기가 변하지 않는다. 

준철이 주먹을 꽉 쥔다. 세진을 쳐다본다. 입을 연다.


"진짜면 나도 해보게." 


일순, 세진이 멍한 표정을 짓더니, 파하, 하고 크게 웃는다. 근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빈은 같이 낄낄 웃으며 쳐다본다.

"아이, 새끼가, 그런거면 진작 말을 하지. 쫄리게 하고 있어." 

세진이 준철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한다. 


"언제 출장내고 우리 학교 오든지. 내가 지금까지 여자애 3명은 꼬셔놨거든. 그 중에 한명이 진짜 반반한데, 몸매도, 와. 애가 호구같아서 만져도 아무 말도 못해. 어제 기어이 내가 그 년 입으로..."


빡. 하는 소리가 울린다. 준철이 머리를 뒤로 젖혀 세진의 코를 세게 부딪혔다. 세진이 코를 부여잡고 쓰러진다. 준철이 휴대전화를 꺼내 터치한다.

"녹음 다 했다." 준철이 피를 철철 흘리는 세진의 멱살을 잡고 말한다. "어쩐지 오늘 신고가 없다 했더니."


"농, 농담이야! 농담. 농담이라고!" 세진이 쿨럭거리며 준철의 손을 잡는다. "아니, 세상 어떤 선생이 그런 더러운 짓을 해. 안하지. 안해, 거짓말이라고, 농담이야. 술자리에서 하는 더러운 농담!"

근혁과 우빈은 자기 앞에 일어나는 일이 너무 현실감이 없어, 멍하니 쳐다만 본다.


"조사해보면 알겠지. 녹음은 했고, 이제 너네 학교 학폭 담당 경찰관 통해서 너네 학교 조사갈거야. 그러면 이게 농담인지 아닌지 알겠지." 준철이 씩씩거리며 말한다. 


"아, 아, 아냐. 아니야. 야 준철아. 나, 나, 나 알잖아. 나 그럴 배짱도 없는 겁쟁이 새끼라고. 아냐. 너 오해, 오해하는거야." 세진이 준철의 팔을 부여잡고 더듬는다. 준철은 거세게 그의 팔을 뿌리친다. 세진은 휘청거리며 길바닥에 넘어진다. 그의 얼굴에 핏자국과 빗방울이 뒤섞여 얼룩진다.


"크,크크. 이,이제. 니가, 말,말,말 더듬이네."  

슬그머니 나온 지완이 킬킬거리며 세진을 쳐다본다. 세진은 핏발 선 눈으로 지완을 쳐다본다. 

"이 개새끼가..." 세진이 절룩거리며 일어선다. 근혁이 지완에게 다가가는데, 준철이 성큼성큼 걸어 지완 앞에 선다. 이윽고 오른손을 거세게 휘둘러 지완의 뺨을 후린다. "끼어들지 마라." 

지완이 휘청거리며 뺨을 두 손으로 감싼다. 

준철은 몸을 돌려 세진에게 다가간다.


"니 돈 있나?" 


준철이 말한다. 세진은 영문을 몰라 그를 쳐다만 본다.

"한 5억, 5억만 내라. 그러면 니 녹음한거 지우고, 아무 일도 없던 걸로 할게." 준철이 세진을 쳐다본다. 세진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진다.


"없으면 뭐, 아동청소년 보호법 위반으로, 드가자."

준철이 발로 세진의 정강이를 툭툭 찬다. 

세진은 호흡이 떨린다. 

준철은 담배에 불을 붙인다. "생각해 봐라, 내일 까지."

금세 담배를 다 피우고는, 준철은 고기집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

근혁과 우빈은 어안이 벙벙하여 서로 쳐다본다. 


비가 내린다. 아직도.


4/ 

다섯 친구들은 다시 고깃집 테이블에 앉았다. 근혁은 말 없이 남은 고기를 굽는다. 우빈은 눈을 깔고 휴대전화를 보며, 맥주를 홀짝인다. 지완은 미소를 띤 채로 친구들을 힐끗거린다. 준철은 남은 술을 모두 들이켠다. 세진은 휴지로 얼굴을 다 닦고, 준철에게 말한다.

"2억, 2억으로 해."

준철이 눈썹을 찡그린다.

"뭐라카노."

"친구야. 아니, 형사님. 최형사님. 돈이, 5억이, 어디 애들 장난감도 아니고, 어떻게 그걸 뚝딱 마련해."

"내 알 바 아닌데."

"우리 집도 완전 낡아서, 주담대 받아도 2억이 안돼. 지금 주식에도 3천만원 물려있고..."

"그럼 줄 긋고 살던가."

"야이, 씨발. 아니, 아냐. 미안해, 미안합니다. 그래도 조금만 줄여주세요. 네?"

"니 교직원 공제회 대출 나오잖아. 니 마누라도 교사고. 둘이 영끌하고, 집 담보로 대출 받고, 그러면 나오겠구만. 주식은 팔고."

"......"

침묵. 무거운 침묵뿐이다. 아직도 비는 거세게 내린다. 빗소리만 가득하다.

"저, 준철아. 그 아무리 그래도... 니도 경찰인데.... 돈을 받고 그러면"

불편함을 버티지 못하고 근혁이 머뭇거리며 말한다.

"그래, 친구끼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우빈이 옆에서 거든다.

"저 새끼 말하는거, 못 들었냐? 성범죄자 새끼를 옹호하네, 허." 준철이 코웃음친다. "녹음한거 다시 들려줘?"


"그,그,,그래. 그러지마. 어,어차피, 저 새끼, 곧,곧,곧 죽어." 


지완이 세진을 쳐다보며 웃는다. 세진이 벌떡 일어선다.

"뭐? 이 또라이가. 뭐라고? 내가 왜 죽어?" 세진이 지완을 노려본다.


"끼어들지 말라고." 


뻑, 하는 소리가 먼저 들린다. 준철이 지완의 뺨을 세게 때린다. 지완이 왼뺨이 시뻘겋다.

"히,히히. 니도, 똑,똑같다. 준철아." 지완이 뺨을 감싼채로 준철에게 말한다. "경찰이나, 선,선생이나, 똑같이, 썩,썩어갖고, 크크."

근혁은 지쳐 한숨을 푹 쉰다. 아, 모르겠다. 어쩌다 이렇게 됐나.

준철은 왼손을 크게 들어, 지완의 오른뺨을 뻑, 하고 갈긴다. 지완은 아랑곳 않고 낄낄거린다.

우빈은 불편한 듯 맥주만 연신 홀짝인다. 세진도 어이없다는듯 지완을 쳐다보며, 맥주를 꿀꺽 마신다. 근혁만 빼고 다들 술잔을 비웠다.


"아무튼, 잘 생각해보고. 내일까지 연락해라. 연락 없으면 경찰서에서 만날거고." 준철이 겉옷을 챙기며 일어선다. 세진은 일어서는 준철을 멍하니 쳐다본다. 뭔가 말하려는 듯 하더니, 고개를 푹 숙인다.

"잘 먹었다. 근혁이 니가 사는거제? 담엔 내가 살게." 준철이 근혁의 어깨를 툭 치고는, 고깃집 밖으로 걸어간다. 네 명만 남았다.


"저, 나도, 이제 가봐야 겠어. 내일 일찍 카페 열어야 해서." 우빈이 허둥거리며 일어선다. 근혁을 보고, 세진을 보고, 지완을 보고, 시선을 여기저기 옮기고는 눈 둘 곳을 모르는 듯이 출입문으로 고개를 돌린다. 

"다, 다음에 보자!" 우빈이 나간다. 세 명 남았다.


근혁은 한숨을 푹 쉰다. 오늘 퇴근할 때 까지만 해도 기분 좋은 날이었는데. 좋은 손님들만 와서 차도 세 대나 팔고, 오랜만에 본 친구들 고기 사주고, 기분 좋게 집에 갈 예정이었는데. 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근혁은 머리를 긁적인다.


"근혁아, 너..." 세진이 말한다. "혹시 1억만, 빌려줄 수 있냐?"

근혁은 한번 더 한숨을 푹, 쉰다. 마지막으로 나누는 대화가 이런거라니. 천천히 세진에게 대답하려는 순간,


세진이 갑자기 입에서 거품을 내뱉는다. "컥, 커억." 

세진은 목을 두 손으로 감싼다. 거품이 보글보글, 계속해서 세진의 입에서 뿜어진다. 

근혁은 자기 눈 앞에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쳐다만 본다.

세진의 입에서 거품이 쏟아진다. 이윽고 세진의 얼굴이 보랏빛으로 물든다. 세진은 목을 두 손으로 감싼 채로, 방방 뛰다가, 머리를 벽에 쾅, 쾅 박는다. 거품은 아랑곳 않고, 쏟아져 나온다. 드럼세탁기 광고에서 본 거 같은데, 근혁은 멍하니 생각한다. 그러다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세진을 도와주려 소리친다. "사장님, 119, 119 불러주세요!" 


"소, 소, 소용, 소용없어." 지완이 웃음기를 싹 거둔 채로 말한다.

"미리 실, 실험해 봤거든. 맥주에 섞으면, 10초 뒤면, 죽,죽어." 

"그게 무슨..."

근혁의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스쳐간다. 우빈이는? 준철이는?

근혁은 다급히 일어나 고깃집 밖으로 뛰쳐나간다. 


근혁은 우빈과 준철을 금세 찾아낸다. 준철은 가게에서 스무 걸음 정도 멀리서, 쓰러진 채로 거품을 가득 물고 있다. 우빈도 그 옆에 나란히 쓰러져 있다. 거품이 입가에 흥건하다.


근혁은 선 채로 멍하니, 그 둘을 쳐다보고 있다. 


"근, 근혁이 너, 너는 괜찮아. 니, 니, 맥주에는 안,안,안탔어."


너는 날 한번도 안 놀렸으니까. 

지완이 웃으며 말한다.


오늘은 다섯 친구들이 만나는 날이었다. 

비는 어느새 그쳤고, 친구들은 그저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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