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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야 Feb 02. 2023

약하지는 않은 사이

단편소설

1/
'열 개, 주문 가능한가요.'

'네, 고객님. 지금 이벤트 기간이라
10+2, 총 12개 보내드립니다.'

'효과 있는 거 맞죠.'

'아 고객님. 물론 개인차는 있습니다만,
사용하신 분들 후기 모두 관계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고 남겨주셨다는 점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날아오는 눈웃음. 미나는 아주 살짝, 석연치 않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미나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 만취해 있었고, 적당한 석연찮음 같은 건 쉽게 날려버릴 수 있었다.

'계좌, 알려주세요. 지금 입금할 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고객님. 곧 보내드리는
가상계좌로 금 159,000원 입금해 주시면
익일 내에 우체국택배로 배송됩니다.
하오나 1알이라도 섭취, 사용하셨을 경우
에는 교환 및 환불, 손해배상 일체 불가하오니...'

기도하는 손 모양 메시지. 아, 알게 뭐람. 미나는 몽롱했다. 이윽고 미나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려 돈을 보냈다. 내일이면, 아니면 모레, 뭐 언제가 되었든 간에, 김태진, 너는...

"너는, 이제, cc...."
나랑, 이라는 말과 함께 미나는 휴대전화를 풀썩 놓쳤다. 푸우, 푸우ㅡ 하는 숨소리와 함께 미나는 곧바로 잠에 온몸을 맡겼다. 편안히.

2/
"하, 그래서..."
윤진은 하트 모양의 알약이 들어간 봉투를 손으로 집고,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술 김에, 사기꾼들한테, 16만 원을 주고 이 약을 샀다?"
"... 아냐.."
미나는 죽기 일보 직전의 모기처럼, 힘없이 중얼거렸다. 본래는 물결처럼 곱게 일렁이는 그녀의 긴 머리가, 오늘은 마구 헝클어져 있다. 얇고 긴 눈썹이 축 처져있고,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 미나는 다시 입을 연다.
"사기, 아냐. 아마...."
"아니긴 뭐가 아냐!"
윤진은 테 없는 안경알 너머로 불을 뿜을 듯이 째려보며 세차게 반박한다. 머리는 꽁지 하나로 묶고, 편안한 후드티를 입은 윤진이지만 미나를 바라보는 마음은 도무지 편하질 않았다.
"세상에, 말이 되냐. 21살이나 먹고, 페로몬 알약이라니. 그런 게 있으면..."
이제 윤진은 입에서도 불을 뿜을 듯했고, 미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윤진은 말을 하려다가 심호흡을 하고 내뱉는다. 이게 처음은 아니긴 했다.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미나와 알고 지냈던 윤진은, 미나의 기행을 여러 번 눈앞에서 봐왔다. 평소에는 세상 얌전한 미나는, 가끔 스위치가 눌리면 놀랄만한 행동력과 발상으로 기상천외한 행동을 하곤 했다.
학교 앞에서 파는 색깔 병아리가 불쌍해서 병아리를 파는 아저씨에게 빽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배드민턴 하이클리어를 못하는 친구에게 체육선생님이 다 들으라는 듯 놀리는 말을 하자 배드민턴 채를 뽀각, 두 동강 내고는 체육관을 나가버렸고, 공원에서 버려진 강아지를 만나고는 새벽 내내 강아지를 껴안고 있었다. 그 외에도 더 있지만...
"그렇지만..."
"그치만은 뭐."
"김태진이 계속 어물쩍대니까..."
미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윤진을 쳐다봤다. 하지만 목소리는 그대로 작았고, 얼굴은 붉어져있었다. 윤진은 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태진 선배. 네 짝사랑."
태진, 이라는 말에서부터였는지, 아니면 짝사랑이라는 말에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미나의 얼굴이 붉은 것을 넘어 터질 듯이 빨갛다.
"아니, 그렇다곤 해도. 이런 이상한 걸 사면 니 짝사랑이 해결이 돼? 페로몬 알약은, 무슨. 요즘 초등학생도 안 속겠다. 너 이거 sns로 산 거지? 야, 약사가 처방해 주는 거 아니면 약 아무나 못 팔아. 이거 그냥 알약 모양 초콜릿, 뭐 그런 거라고!"
16만 원짜리 초콜릿, 이라는 말까지 하려다가 윤진은 간신히 참아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미나는 눈에 눈물까지 그렁그렁했다.
"나도 아는데... 그렇지만.. 너무 답답했단 말이야."
미나는 울음을 간신히 참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윤진은 생각했다. 아, 태진 선배님. 우리 죄 많은 선배님.
윤진은 벤치에 등을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윤진과 미나는 O대학에서 가장 높고 오래된 나무 바로 밑에서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하늘은 파랗고, 수업은 없었고, 학식도 맛있었다. 내 오랜 친구가 사기꾼에게 돈을 퍼다 준 일만 아니었다면, 아니, 내 오랜 친구가ㅡ

"미나 안녕. 윤진이도 있네. 공강이야?"

이 사람을 짝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윤진은 기가 막히게 찾아온 태진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래, 마음을 어떻게 할 수는 없으니까.

3/
김태진은 무난한 남자였다. 적당히 까무잡잡하고 건강한 피부. 적당한 넓이의 어깨. 적당히 평균보다 조금 더 큰 키. 적당한 이목구비, 적당한 패션. 적당히 운동도 고루 잘했고, 적당히 성격도 좋아서 미워하거나 미움받는 사람 없이, 학과 사람들과 고루 잘 지내는 남자.
모든 방면에서 무난하고 적당해서, 어느샌가 다들 뒤돌아보며 '저 정도면 정말 괜찮은데?'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남자. 그런 남자였다.

그래서 여느 남자들과 비슷하게, 그는 축구, 농구, 달리기 등 여러 운동도 자주 했는데, 딱 하나 조금 특이한 점이 있었다. 그는 등산부의 회장이었다. 등산, 그는 등산을 제일 좋아했다. 마을의 조그만 산을 오르는 것도, 높은 지리산도, 무엇이든 그는 산을 오르는 걸 좋아했다. 정상에 올라서면 상쾌했고, 올라가는 과정에 땀 흘리는 것도 좋았다. 내려갈 때의 홀가분함과 신중함도 좋았다. 그는 등산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즐겼다.

그래서 그는 대학교에서 2학년이 되자마자 등산부를 만들었고, 모나지 않고 두루두루 잘 지내는 성격이 여러 사람들을 등산부로 이끌었다. 하지만, 태진을 따라온 학생들 대부분은 낮은 산을 가볍게 오르는 것을 선호했기에, 태진도 주변의 낮은 산만 가볍게 오르기를 반복했다. 적당히, 사람들이 떠나가지 않을 만큼의 난이도로 오르내리곤 했다.

그런데, 미나가 등산부에 들어온 것이다. 그녀는 몇 번 태진과 함께 마을의 자그마한 산을 오르내리고는, 어느 날 산 정상에서 대뜸 이렇게 말했다.
"지리산에 가요, 선배."
태진은 그녀를 멀뚱멀뚱 쳐다보고는, 이윽고 시원하게 웃었다. 푸하하, 살짝 멍해진 미나를 보고, 태진은 이어 말했다.
"고마워."
태진이 미나의 눈을 보며 활짝 웃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청량함을 한데 모은 미소를 보며, 미나는 생각했다.
아, 빠져버렸구나.
나는 이 남자를 좋아했고, 좋아하겠구나,라고.
그렇게 미나의 짝사랑은 힘차게 시작되었다.

4/
"미나 안녕, 윤진이도 있네. 공강이야?"
태진이 벤치에 앉은 미나와 윤진을 쳐다보며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미나랑 그냥 이야기 좀, 선배는요?" 윤진이 답했다.
"나는, 그냥 산책." 태진이 말하며 미나를 흘깃 쳐다봤다. 미나는 목이 빳빳하게 굳어서는, 삐걱거리며 얼굴을 태진에게 향한다.
"안녕하세요. 선배." 미나가 간신히 답했다.
"안녕, 미나. 혹시 잠을 잘못 잤어?" 태진이 웃으며 미나에게 말한다. 미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답한다. 다행이네, 태진이 이어말했다.
"참, 미나 너 이번 토요일에 시간 있어?"
미나는 길을 묻는 외국인을 만난 것처럼 멍했다가, 골똘히 생각했다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끄덕, 목 다치겠다, 윤진이 마음속으로 말했다.

"잘됐다. 지리산... 은 안되지만, 제법 높은 산에 가보려고 하거든. 800미터짜리, 가볼래?"
라고 미나에게 말한 후, 태진은 눈을 돌려 윤진을 쳐다본다. 미나 혼자에게만 묻기는 미안하다는 생각이 담긴 시선이었다. 윤진은 아니요, 전혀, 저는 산 오르는 거 힘들어서. 칼같이 답했다. 태진은 안도한 듯, 당황한 듯, 그러면 미나야, 나중에 문자 할게! 하고는 강의실을 향해 걸어갔다. 미나는 대답도 안 했는데.
"갈 거지?"
"응."
대단한 녀석이다. 윤진은 생각했다. 방금까지 기어들어가던 쭈글이는 어디 가고, 미나의 두 눈은 다시, 불타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그 사기당한 하트 알약을 손에 꼭 쥐고. 미나의 의지는 다시 굳건해졌다.


5/
그리고 기다렸던 토요일 아침,
미나는 마음이 꺾여 나가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미나 선배! 안녕하세요."
"미나. 오랜만이네!"
"오, 미나까지 왔으니까 총 5명이네."
휘승, 진아, 우석. 그리고 태진과 미나. 다섯 명이었다.
단 둘이 아니었다. 다섯이었다.
미나는 눈에 띄게 축 처져서는, 터벅터벅 걸어 등산로 입구까지 함께 왔다.
"자, 등산부 회원님들. 오늘 가는 산이 꽤 높습니다. 물이랑 간식은 챙겼죠? 저는 혼자 여러 번 와봤는데, 여러분은 초행길이니까. 제가 밟는 곳을 잘 따라오세요. 물론 계단이 여러 곳에 있지만, 가끔 돌길도 있습니다. 안전이 언제나 최우선! 같이 사진 하나 찍고, 안전하게 출발합시다."
태진의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 속 미나의 표정은 심각하게 우울했지만, 나머지는 다들 표정이 밝아 적당히 중화되었다.
...
그 후로 미나의 등산은, 엉망진창이었다.
앞을 안 보다가 나무에 머리를 콩, 박은 것이 3번.
계단에 걸려 넘어질 뻔한 것을 휘승이 한 번, 진아가 한 번 잡아줬다.
돌길을 오를 때는 차라리 미끄러져 버릴까, 하는 마음이었지만,
아무리 미나라도 그것은 무서워서, 돌길에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바위를 손으로 잡아가며 안전하게 올라갔다.
내려오는 등산객과 부딪히고 사과하기도 했고,
멍하니 걷다가 갈림길에서 혼자 반대방향으로 갈 뻔한 것을 우석이 잡아끌어서 간신히, 정상에 무사히 도착했다.
정상을 몇 걸음 남겨두고, 숨을 가쁘게 쉬며 미나는 태진을 쳐다봤다.
태진은 정상까지 한 번도, 미나에게 말을 걸거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눈물이 핑그르르 고였다. 미나는 정상에 도착해서는 태진에게 등을 돌려 머리를 묶는 척했다. 뚝, 뚝. 눈물이 흘러내리기 직전에 몸을 돌려서, 태진은 미나의 눈물을 보지 못했다.

6/
별일 없었다. 우리의 등산은.
그 후 정상에서 같이 사진 찍고, 점심을 가볍게 먹고, 내려와서, 따뜻한 백숙 먹고, 갈라져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미나는 태진, 우석과 함께 대학교 기숙사로 향했고, 휘승과 진아는 각자 자취하는 집으로 갔다. 태진은 우석과 적당히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하하 웃는 소리가 미나의 귀에 들어갈 듯하다가 스쳐 나갔다. 우석이 몇 번 말을 걸고, 태진도 미나에게 말을 걸었지만, 미나는 적당한 웃음과 적당한 대답으로 끝냈다. 스스로가 바보 같다고 여겨졌다. 둘이서 등산을 하고, 둘이서 정상에서 김밥을 먹고, 가능하다면 둘이서 손을 잡기도 하고, 가깝게, 붙어서, 내려오고 싶었는데.
미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아닌가 보다. 흔한 짝사랑이잖아. 나만 혼자, 선배를 내 마음속에 멋대로 끌어들였을 뿐이다. 바보같이, 한 달 열심히 과외하고 벌었던 귀한 돈을 이상한 알약...이나 사는데 써버리고. 심지어 효과도 없는 건데.

윤진이 말대로, 사기꾼들이었다. 혹시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먹어본 알약에서는 적당히 달콤한 초콜릿 맛이 났다. 그것도 싸구려 초콜릿. 그것뿐이었다. 만화 같은 사랑의 묘약은 당연히 없었다. 손톱만 한 크기의 초콜릿은 먹으면 살짝 달콤할 뿐이었다. 편의점에서 2천 원쯤 주면 이런 초콜릿이 수십 개는 들어있는 걸 살 수 있는데, 나는 몇 배나 되는 돈을 주고, 기적을 바랐었다. 기적은 내 눈앞에, 김태진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미나는 호주머니 속에 알약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태진을 쳐다보았다. 적당히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 동글고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 늘 살짝 올라가 있는 입꼬리, 미나는 태진의 그 모든 모습을,
마지막으로 새겨두기 위해
열심히 쳐다보았다.

7/

우석과 이야기하던 태진이 미나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미나를 쳐다보았다. 걸음을 멈추고 미나가 걸어오기를 기다렸다.
"아, 나 뭐 살게 있어서. 편의점 갔다 갈게. 너희 먼저 가라!"
우석이 갑자기 떠올린 듯 말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기숙사로 가는 좁은 골목길, 태진과 미나 둘만 있었다.
"미나ㅡ"
"선배."
무언가 말하려는 태진을 가로막고 미나가 입을 열었다.
"손 좀 펴주세요."
태진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갸웃, 하고는 미나를 향해 오른손을 건넸다.
"이거, 비타민 초콜릿이에요."
미나가 알약 봉투를 손에 쥐어주며 태진에게 말했다. 태진은 멍하니 그녀를 쳐다봤다. 미나는 숨을 흡, 쉬고는 결심한 듯 다소 빠른 목소리로, 하지만 단호하게 또박또박 말했다.

"이거 제가 피곤할 때 먹는 건데, 맛은 좀 별로지만, 안에 종합 비타민이 다 들어있어요. 선배는 등산도 자주 하고, 또 이제 3학년이니까 바쁘잖아요. 이거 드시고, 드시고 힘, 힘내세요. 저 선배, 많이 응원하고 존경..."
"나도."

태진이 미나의 말을 끊었다. 조금 놀란 미나는 태진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태진이 주머니를 뒤적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알약 봉투가 나왔다. 태진이 알약 봉투를 미나의 왼손에 쥐어 줬다. 똑같은, 빨간 하트 모양 알약이었다.
"나도 먹어봤는데, 그냥 초콜릿이더라고. 하하."
태진이 머리를 긁으며 멋쩍게 웃었다. 태진의 눈은 미나만을 바라보고 있다. 미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진을 똑같이 바라본다. 눈과 눈이 서로를 마주 본다. 미나가 얼굴이 붉어져서 뻐끔거린다.
"서, 선배도, 그, 그러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정당당한 방법이 아니라서. 그냥 버리려다가, 하나만 남겨뒀어." 태진이 속삭였다.
"같이 먹을래, 비타민?"

미나는 줄곧 태진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사기꾼이 아니었어, 미나는 생각했다.
미나와 태진은 눈을 맞춘 채로, 그저 파랗게 웃었다.

약효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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