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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야 Mar 19. 2023

애프터썬 리뷰

당신에게 해줄 말도 남은 시간도 얼마 안 남은 지금

그런 순간이 온다.

이제 이 사람에게는 마지막 몇 마디밖에 못 해주겠구나,라고 알게 되는 때가 온다.




함께 근무하던 우리 학교 연구부장님이 다른 학교로 이동하게 되셨다. 원하던 지역에 자리가 났고, 원하던 이동이셨다. 하여 분명 기뻐야 할 텐데, 나는 못내 연구부장님이 안쓰러웠다.


연구부장님은 무척 지적이시고 주도면밀한(좋은 의미로)분이셨다. 교육과정을 척척 잘 만드셔서, 나는 오히려 더 걱정이었다. 너무 잘하기만 하셔서  지치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후배들에게도 사려 깊으셨는데, 마음씨가 고우셔서 하고 싶은 말도 참고 안 하셨던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했다.


2월 마지막 날, 연구부장님의 학교 짐을 차에 옮겨드리고 커피를 사러 가면서, 신호를 기다리면서 느꼈다. 아, 이제 몇 마디 안 남았다. 진짜 이제 곧 헤어지겠다. 학교에서 홀로 너무 고생하신 부장님께, 나는 무슨 말을 남겨드리면 좋을까. 사실은 몇 개월 동안 내내 생각했던 그 말을, 나는 어설프게 꺼냈다.





애프터썬은 작년 가을쯤, 독립영화로 영화제에 먼저 선보인 작품이라고 알고 있다. 여러 평론가들이 극찬을 하였는데, 정작 내가 사는 지방 극장들을 뒤져봐도 상영하는 곳이 없었다. 예술, 독립 영화라 대중성은 조금 떨어지겠구나, 하는 걸 단적으로 보여줬다고 할 수 있겠다. 매표도 하기 전에 그렇게 알았다.


실제로 그랬다. 감독이 정말 이를 악물고 예술을 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2월에 서울 여행을 하며 간신히 예매한 애프터썬은 상업적인 영화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관객들이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게 유도하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애프터썬은 듬성듬성하고 여유로운 영화다. 대사가 없어서 주변 소리, 배경음만 들리는 장면이 꽤 많고, 소재도 공감을 사기 쉽다. 아빠와 딸의 휴가날 이야기니까. 아마도 아빠가 딸과 별거 중인 듯한데(이혼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빠는 정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딸에게 근사한 여름휴가를 선물해 주고자 노력한다.


다만 군데군데 보이고 만다. 젊은 아빠의 위태로움이. 딸이 리조트 저녁 무대에서 같이 노래하자고 애원해도, 아빠는 끝내 자리에 앉아서 피하고만 있다. 기묘한 몸짓을 해야만 하고, 딸이 잠든 사이에 바다에 빠져야만 한다. 그는 불안하다.


나에게 있어 거인이자 울타리 같던 존재가 가끔은 나보다 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가 있다. 나도 여러 번 겪었고, 우리 모두 주변의 거인들이 시무룩하고 침울해져서 난쟁이가 되는 모습을 한 두 번쯤 보았을 테다.

도 부모님을 떠올렸다. 이제 내가 언제든지 부모님의 도움이 되어드릴 준비를 해야지. 하면서도 사실 자신이 없어 고민인 마음을 한데 담아서, 그렇게 영화를 보았다. 영화에는 소피와 소피의 아빠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나의 부모님도 계셨고, 우리는 그렇게 함께 영화를 완성했다. 소피를 봤다가, 소피의 아빠를 봤다가, 우리 집을 떠올렸다가... 그러면서.


이 영화는 여유롭고 빈 공간을 많이 주면서도, 자세히 보면 담고 있는 주제들이 꽤 많다. 소피가 어린이와 어른 사이에서 망설이고 부러워하는 모습, 사랑에 대한 호기심, 소피의 아빠가 보여주는 여린 모습과, 딸을 위해 그 모든 걸 견뎌내려는 강인한 모습, 서로를 아끼는 아빠와 딸, 등등. 참으로 생각할 거리가 많다.


그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충격적 이리만큼 와닿았던 장면, 아니 대사가 둘 있었다.

어린 소피가 아빠에게 햇빛 아래에서 했던 말.

아빠가 평생 소피를 지켜주려는 마음으로 했던 말.

그 두 대사를 직접 들으며 느꼈다.


사람은 말 한마디 만으로, 누군가를 평생 사랑하고, 평생 지켜주고, 평생 보호받을 수 있겠구나.


나도 저런 아빠, 남편, 선생님이 되고 싶다. 될 수 있을까? 그래도 되고 싶다.

둘은 참 아름다웠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기회가 된다면 꼭 이 영화를 감상해 보길, 추천한다.

(이제 유튜브, 네이버 등에서 vod로 볼 수 있다.)





(이제는 떠나신) 연구부장님과 함께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나는 말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이제 곧 끝난다. 이제 곧 헤어지는데, 어떤 말을 드리면 최대한 오래 위안으로 남을까. 나는 말했다.


학교가 부장님에게 가혹했어요. 그렇지만 저는 부장님이 얼마나 애쓰셨는지 알아요. 다 압니다.


아니에요. 괜찮았어요. 연구부장님은 그렇게 가볍게 말씀하셨다.


정말 가벼운 일이었으면 했다. 그때 떨리셨던 목소리도, 모자라고 못 미더운 5년 차 교사인 나에게까지 도움을 청하셨던 일도, 그 모든 일이 그저 가볍게 지나간 일이었으면, 괜찮았던 일이셨길.

진심으로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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