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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미 Apr 21. 2023

가난한 여행자의 무식한 마추픽추 모험기(下)

Machu Picchu, Peru

평소라면 한참 단잠에 빠져있을 까무룩한 새벽. 눈꺼풀 위로 달아나지 못한 졸음이 그득한데, 반쯤 겨우 뜬 눈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현재 시각은 오전 4시 30분. 마추픽추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호스텔을 나선 시간이었다.

물론 우리가 줄의 첫머리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벌써 이렇게 많은 이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을 줄이야! 다행히 맨 앞사람과의 거리감이 멀지 않은 걸 보니, 무사히 첫차는 탈 수 있을 것 같다며 일단 한시름 놓았다. 휴.


줄에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여기저기서 모인 여행자들이 우리의 뒤로 빼곡해지기 시작했다. 출발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첫차는 물론이요 몇 번째 차를 탈 수 있었을지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나처럼 아침잠이 많은 사람이 이렇게까지 부지런한 날이 있던가. 여행은 나를 이토록 능동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에 오른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배정된 번호의 좌석에 앉음과 동시에 전원이 꺼진 듯 잠이 들어버렸는지 옆자리 사람의 조심스런 사인이 없었다면 곧 목적지에 도착하는 줄도 몰랐을거다. 조금 몽롱한 상태로 창 너머를 바라보니 바깥 풍경은 고사하고 언제 밝아졌는지도 모를 아침이 되어 있었다.


다시 한번 정신을 차리고 신속히 버스에서 내려 또 다른 줄을 서야 했다. 어째 아침부터 부지런히 줄만 서는 것 같지만…! 확실히 새벽의 시간보다는 모두의 눈에 반짝반짝 생기가 돌았다. 분명 이 입구만 지나면 마추픽추를 조우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겠지!

문득 생각해 보니 남미에 도착한 이래로 비가 온다거나, 심지어 흐렸던 날이 내게는 단 하루도 없었다. 여행길 위에서의 날씨는 앞으로의 일정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꽤나 중요한 요건 아닌가!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오늘. 마추픽추가 눈앞에 펼쳐지기 직전인 이 순간의 날씨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끝내줬다.


거대한 자연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나무 사이로 비치는 풍경은 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생각보다 평탄치 못한 흙길인지라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어도, 앞이 아닌 옆을 보고 걷게 되는 이유는 충분했다.

아침부터 빠르게 움직인 덕에 나름 선두로 들어온 우리는 그 누구도 빨리 가자고 말하지 않았으나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경보 수준의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운이 억세게 좋은 여행자이지 않을까?

저 멀리 펼쳐진 쾌청한 하늘과 웅장한 산맥. 그리고 그 풍경을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햇살 내린 공중도시, 마추픽추를 보게 된 순간 말을 잃고 바라보기만 했다.


자연만이 이룰 수 있는 압도감과 평화로움이 공존하는 곳. 이런 풍경을 볼 수 있음에 가슴속 벅차오름과 함께 떠오른 또 하나의 감정은 다름 아닌 그리움이었다.


이 풍경을 함께 나누고 싶어 떠오르는 사람들이 참 많은 가운데, 몇 년 전 집에서 같이 여행 프로그램을 보고선 '내 평생 페루는 가보고 싶다.'라며 스치듯 말하던 아빠의 말이 생각나 아빠가 몹시 보고 싶어진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 있을 아빠를 잠시 빌려와 옆에 앉히고 함께 이 풍경을 바라보고 싶었다. 어찌할 수 없는 머나먼 거리감이 야속해지는 순간. 아빠. 아빠 딸이 대신 왔어! 내 한국으로 돌아가면 제일 먼저 생생한 여행담을 들려드리리다.

이제는 이른 아침에서 완전한 낮으로 들어가는 시각. 유독 맑게 갠 오늘의 푸른 하늘색이 더욱 짙은 파랑이 되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손을 뻗으면 손끝을 스치지 않을까? 싶을 만큼 몽글몽글한 뭉게구름이 돌계단의 끄트머리에 걸터앉아있었다. 하늘과 가장 맞닿는 곳에 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솔직히 말하자면 마추픽추는 내 상상과는 전혀 다른 곳이기도 했다. 나의 최종 목적지도, 꼭 가보리라 갈망했던 곳도 아니었기에 그저 페루에 왔으면 들러야 하는 랜드마크 정도. 멋있기야 하겠지~ 싶던 나의 자만심을 보기 좋게 와장창 부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장관을 이뤘다.

만약 한껏 기대에 부푼 채 왔다 한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풍경을 요리조리 합쳐보아도 이만한 장관은 떠올릴 수도, 나타낼 표현도 없으므로. 지상낙원이 있다면 이런 풍경이 아니었을런지.

아침도 거르고 떠나온 여정인지라 하루 종일 공복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배가 고프지 않았다. 허기를 이겨낼 만큼 풍족한 경험이 나를 채워주었기 때문일까.


원 없이 마추픽추를 만끽하고선 이제 아구아스 칼리엔테스로 돌아갈 시간. 내려가는 버스 표는? 없다! 마추픽추를 내려가는 트래킹 코스가 꽤나 잘 되어 있어서, 걸어갈만하다는 정보를 들은 우리는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르는 이곳을 조금이나마 더 틈틈이 보기 위해 튼튼한 두 다리를 한 번 더 믿어보기로 했다.


안녕! 마추픽추! 널 보러 여기까지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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