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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미 Mar 30. 2023

수프와 별과 사막여우

Huacachina, Ica

고등학생 시절,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경쾌한 종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제 자리를 찾아갔다.

교실에는 아직 감추지 못한 킬킬대는 웃음들과 덜그럭 거리는 책걸상 소리와 함께 선생님의 등장으로 곧 수업이 시작되었다.


점심시간의 즐거움이 가라앉지 않은 탓인지, 두둑하게 먹은 점심에 이겨내지 못한 식곤증 탓인지 수업 내용이 한 귀로 흘러들어와 한 귀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마도 나뿐만이 아니리라.

분명 교실은 조용한데, 영 어수선한 분위기를 감지한 선생님은 잠시 결심하신 듯 교과서를 덮으며 이야기했다. ‘선생님이 재밌는 얘기 하나 들려줄까?’.

그제야 흐리멍덩했던 눈은 반짝, 귀는 쫑긋.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외쳤다. 네에!


그렇게 시작된 선생님의 이야기는 이집트의 어느 사막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왔다던 여행담이었다.

'에이~ 선생님. 여행담 말고 연애담이요!'하며 수업보다 더 따분하다는 듯이 야유를 보내는 누군가도 있었지만, 덤덤한 목소리로 이어간 선생님의 여행담은 그 어떤 연애담보다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밤 사막의 거센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세워둔 병풍 뒤로 모닥불 하나에 의지해 옹기종기 모여 끓여 먹었다던 이름 모를 묽은 수프. 깊은 밤 내내 뒷목 뻐근하도록 올려다보아도 질리지 않았다던 무수한 별들. 언제 눈이 감겼는지도 모르게 까무룩 잠든 새 기척이 느껴져 눈을 떠 보니 봉고차 위로 올라가 있던 새하얀 사막 여우와 눈이 마주쳤다던 이야기.


마치 그때 그 밤의 사막 한가운데에 떨어진 사람처럼 먼 곳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던 선생님은 제 인생에서 잊지 못할 여행담이라 하셨다.


누군가의 여행담을 들으며 마치 내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되는 듯한 풍경은 처음이었다.

내게 여행이란 막연히 타국에 대한 환상이 흘러넘치는 곳으로의 방문, 또는 비행기를 타보고 싶다든지의 가벼운 흥미 정도의 의미였다.


나는 잊지 못할 풍경을 마음에 담아본 경험이 있던가. 나도 언젠간 꼭 그곳에 가보리라. 아니, 꼭 그곳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순간을 만나야지.

내 인생 최초로 숨어있던 여행 버튼을 눌러버린 사람은 5교시 수업의 그 선생님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내 눈앞엔 저 멀리 사막의 지평선에서 오늘의 안녕을 고하는 노을이 있었다. 발가락 사이로 스르륵, 사라락 하며 빠져나가는 모래 알갱이들이 간지러웠다. 텁텁한 모랫바람이 얼굴을 따갑게 스치고 가도 그저 웃음이 났다. 눈을 감았다 뜨면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풍경이 아니었다.


나는 그 풍경을 바람에 멋들어지게 깎인 모래 절벽에 걸터앉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녁이 되어 바람이 조금 거세진 탓에 접힌 옷에는 금방 모래가 수북이 쌓였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주변에서 무어라 말을 걸려다가도 나는 꽤나 진지한 얼굴로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던지, 이내 말을 거두고 내 옆에 걸터앉아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남겼고, 연신 감탄하는 소리를 내는 사람과 두 손을 펼쳐 모래를 가득 퍼담아 모래시계 속 흘러가는 시간처럼 떠내려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이윽고 해는 언제 떴었냐는 듯 고요히 사라졌다.


수프도, 별들도, 사막 여우도 없었지만 이카의 사막 언덕에서 본 찬란한 석양, 발밑으로 느껴지는 미적지근한 사막 모래,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온전한 여유를 느껴도 되는 이 순간이 나는 무척이나 그리워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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