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guna Paron, Huaraz
당장이라도 살이 익을 것 같이 내리쬐는 햇볕과 가볍게 걷기만 해도 몸이 축축 처지는 120%의 습도.
아직은 코에 익숙지 않은 향신료 냄새. 이곳은 남미로 넘어와 도착한 첫 도시, 와라즈(Huaraz)다.
도시 자체가 해발 3,000m가 넘는 고산지대여서 그런지 감기몸살이라도 온 듯 몸은 으슬으슬, 숨은 턱턱 막히기 시작했다. 아, 이거 컨디션이 영 좋지 않은데….
그래도 어쩌겠는가. 트래킹의 성지인 와라즈에서 호스텔 침대에 마냥 누워 있기엔 가야 할 곳도, 해야 할 것도 너무 많았다. 이것이 입국 1일차인 여행자의 패기일지라도.
마음은 준비 만만이니, 빠른 실행력으로 호스텔의 카운터 직원에게 내일 당장 합류할 수 있는 트래킹이 있는지 대답을 재촉했다.
직원이 나를 잠시 동안 올려다보더니 '얘 상태 썩 좋지 않음'이라는게 느껴졌을까.
태어나서 산을 타본 경험이 없는 초심자에게 추천할 만큼 쉽고, 1시간도 아닌 50분만 오르면 끝내주는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열렬한 영업(!)에 홀라당 넘어가 예약한 '파룬호수(Laguna Paron)'로 출발! 했 는 데…!
미쳤어, 여길 어떻게 올라가?
여짓 살면서 본 적 없는,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거대한 돌무덤을 보고 당장에 든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숨 쉬는 것도 힘들어 죽겠구만!
우리를 이끌고 여기까지 온 일일 가이드는 저 살인적인 돌무더기를 올라야 영롱한 에메랄드빛 강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고 했다. 그래도 어떡해. 남미에서 처음으로 도전한 투어이기도 했고, 소풍도 아닌데 산 오른답시고 신나게 싸 온 도시락과 고산병에 대비해서 먹은 소로체필의 약발이 도는 한 미친 셈 치고 올라가 보기로 한 것이다.
어느 정도 올라왔을까. 낙오는 절대 안 된다는 일념 하에 이를 악물고 돌길을 기어올랐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허벅지의 저릿함. 나름 체력으로 어디서든 쉽게 지지 않는다고 자부했건만…! 이런 돌무더기는 예상 밖이잖아!
자연스레 터져 나오는 거친 숨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네댓 번을 쉬어가며 뒤를 돌아보니, 지면은 이미 저-기 멀리 아득해진지 오래. 일순간 발이라도 헛디디면 돌 틈 사이로 빠져 골로 가기 딱 좋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한발 한발 내딛으면서 '우오오! 떨어질 것 같아!'라며 무서워하는 우리에 비해, 물 만난 물고기 마냥 앞장서서 혼자 올라가던 가이드는 '여기가 내 집이오'하는 것 마냥 겅중겅중 뛰 다니더니 뒤돌아서서 'Hey guys! come on!'을 외친다.
가무잡잡한 피부와는 다르게 화이트닝 했어요~ 할 만큼 새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씨이익- 웃으면서.
미소는 합격이지만, 괜히 얄미워 보이는군. 그러고선 뒤늦게 우리가 헉헉대는 걸 확인했는지 'Are you okay?'라고 묻는 것도 잊지 않고.
그래서, 영롱한 에메랄드빛 호수를 보았느냐고?
결과적으로는 봤다. 그 호수. 비록 내일 아침 나를 무지 괴롭히는 근육통이 올지언정!
힘겹게 올라온 만큼 절대 쉽게 내려가지 않겠노라며 힘차게 숨을 고르고 둘러본, 내 눈 한가득 들어온 풍경을 보면서 어제 나에게 영업한 그 친구를 용서하기로 했다. 흥. 이쁘긴 하네.
호흡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아무렇게나 튀어나와있는 돌부리에 앉아 배낭 한가득 싸온 과일을 꺼내 먹었다. 냠냠. 비쩍 말라버린 입안에 달디단 과즙이 한가득 퍼지니 하산 길도 거뜬히 갈 수 있겠다는 용기가 솟아났다. 아, 이곳이 바로 무릉도원이로구나.
한참 행복감에 젖어 이때까지는 몰랐지. 어느 산이든 오르는 과정이야 그렇다 치고, 내려가는 과정이 더 힘들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