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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미 Jun 01. 2023

여행지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Sucre, Bolivia

"잔잔한 곳이에요. 마음이 평화로워질 만큼."

매일 밤 새로운 여행자들과 술 한 잔씩 기울이는 것이 일상이 되어갈 때 즈음, 이제는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에게 스쳐 들었던 도시, 수크레(Sucre). 입에 감기는 어감도 썩 좋다. 불어로 '설탕'이라는 뜻이란다. 나는 어릴적부터 어감이 좋은 단어나 이름을 가진 것들에 쉽게 정이 가곤 했다.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적절한 시기에 발을 들인 이 도시에 특히나 마음이 가는 일은 필연적이지 않았나. 기억을 되짚어보자면 마음이 조금 더 기울었던 곳들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온갖 관광지를 쏘다니던 대도시 보다 느지막이 걷는 시간이 전부였던 조용한 소도시였으니.

이제는 전망대를 찾아 오르는 일이 제법 익숙하다. 시야에 걸리는 것 하나 없이 탁 트인 풍경이 주는 해방감은 꽤나 중독성 있다. 서울 한복판의 높디높은 빌딩 밀림에서는 겪기 힘든 감정이기 때문이리라. 온통 새빨간 지붕의 도시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자니, 문득 언젠가 읽었던 책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등장한 장소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끝없이 이어지는 적갈색 지붕들. 빽빽한, 거의 빈틈없는.」


책 속에서 묘사된 피렌체의 모습은 겨우 이 한 줄이었지만, 왠지 그곳과 닮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인들의 성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곳. 갑자기 도시 전체가 로맨틱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곳에서도 누군가 사랑을 속삭이며 영원을 약속했을까? 벽 어딘가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남기며 서로를 향한 미소를 지었을까.

머릿속에서 로맨스 드라마 한편을 찍고서야 아쉬움 없이 전망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이 도시에 머무는 동안 몇 번이고 또 오르겠다는 하는 생각을 하면서.


수크레에 도착한 이후로 하루 종일 걸었으니 적잖이 지칠 법도 한데,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 공원을 보니 다리가 멋대로 움직인다. 공원이 어디로 도망가는 건 아니지만, 오늘 이 순간은 오직 지금뿐이므로.


떠다니는 공기가 적당히 미지근해 풀잎의 냄새가 더욱 진하게 코를 스친다. 벤치에 앉아있다 보면 짹짹거리는 새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파도 소리가 참 예쁘게도 어울리는 곳이다. 아, 평화롭다.

요즘의 나는 낯선 곳에서 자주 마음이 동한다.

무언가 마음에 담을 여유가 없던 나날을 지나 이윽고 현재에 닿고 보니, 여행자로 살아온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내 마음속 보물 상자에 들인 것들과 곳들이 꽤나 많다는 사실이 나를 풍족하게 한다.


뜨끈해진 벤치에서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 없는 발걸음이 한마디로 방랑자 상태였다. 마음이 평화로워질 만큼 잔잔한 곳.

스치는 모든 것에 여유로움을 느끼며 나는 아무래도 속절없이 이곳에 빠지는 중인듯하다.

그래서 어쩌면 이 도시는 사랑과 닮아있다고, 이곳에 꽤 오래 머물 것 같다는 예감은 아마 적중률 100%, 아니 1000% 이지 않았을까.

걸어온 걸음걸이마다 사랑이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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