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버킷리스트 뿌수기(2)
먼저 세 사람의 소개로 이 글을 시작하고 싶다. 내가 아는 수영인들 중 새빨간 수영복이 제일 잘 어울리는 S양, 접영할 때 날쌘 돌고래처럼 레인을 날아다니는 E양, 그리고 아무리 헤엄쳐도 지치지 않는 체력의 소유자 H양. 이미 눈치챘겠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수영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반은 두세 달에 한 번씩 무뎌진 초심을 바로잡자는 목적으로(과연?) 가벼운 회식을 한다. 그날도 강습 후 뒷정리를 하느라 조금 늦게 도착한 회식 장소에는, 다들 이미 한 잔씩 걸치며 한껏 신난 분위기였다. 방금 운동하고 온 사람들답지않게 넘치는 활기에 기가 눌릴 정도였다. 나는 조용히 빈자리를 찾아 앉으려고 보니, 매번 가벼운 목례로만 인사를 나누던 사이의 또래 친구들이 먼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또래 친구들이 바로 S양과 E양이었다.
나는 사회생활로 쌓아온 특유의 서글서글함으로 연상의 사람과는 금세 친해지는 편이었지만, 같은 또래의 사람들에게는 어쩐지 다가가기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그들의 사복 차림은 물론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샤워할 때는 각자 씻기 바쁘기 때문에, 기억나는 얼굴이라고는 강습 중 잠시 숨을 고를 때의 모습뿐이었다. 실리콘 수모로 인해 약간씩 밀려 올라간 이마와 눈꼬리 때문에 조금 날카로운 인상이었는데(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렇게 보니 다들 세상 순한 사람들 같았다.
시끌벅적한 주변에 비해 유독 이 테이블만이 조용했다. 나는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 어색함을 깨트릴 용기가 필요한 순간에는 알코올의 힘을 빌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확실히 맥주 한 잔씩 걸치고 나니 말이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S양과 E양은 동갑, 그리고 내가 그들보다 두 살 많은 언니였다. 게다가 S양과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사는 이웃 주민이었고, E양과는 독서라는 공통 관심사로 한껏 대화에 열을 올렸다. 무엇보다 대화의 중심에는 꼭 수영이 있었다. 우리는 어디 있다 이제서야 나타났냐는 듯 호칭은 자연스레 언니 동생으로 바뀌어있었으며, 번호 교환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회식이 끝나고 각자 집에 갈 준비를 하던 중, E양이 말했다. '이번 주말에 같이 수영하러 가실래요?'
우리는 망설임 없이 무조건적인 예스를 외쳤다. 즐겁게 수영할 친구가 생겼다는 기대 반, 오늘 하루가 지나면 스쳐 지나갈 인연이 될 거라는 생각 반으로 우리의 미래를 반신반의했으나, 그녀들은 한 번 했던 말은 무조건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약속한 주말이 다가오자, 자신과 동갑인 수영 친구 한 명을 더 데리고 와도 되겠느냐는 E양의 소개로, 세명 중 마지막 멤버인 H양까지 모이게 되었다. 어색할 줄 알았던 만남은, 정말 간만에 즐겁다는 감정이 선명하게 느껴진 날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똑같이 좋아하고, 함께 즐길 수 있는 동지가 생긴다는 것은 정말이지 신나는 일이었다. 마치 혼자 텅 빈 놀이터에서 조촐한 모래성을 쌓고 있던 내게, 같이 놀자며 하나둘씩 모여 더 크고 더 멋진 성을 완성하게 되는 과정 같았다. 각자 수영을 시작한 시기도 비슷해서 서툰 부분도, 고민되는 지점도 똑같았다. 선크림을 몇 번이고 덧발랐음에도 새까맣게 타버린 피부가 우리가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를 증명해 주었다.
그날 우리는 아침 일찍 만나 늦은 밤이 될 때까지 함께였다. 3차까지 자리를 옮겨도 수영 얘기는 끝이 없었다.
그덕에 알게된 그녀들의 정보는 이랬다. 하나. 나를 제외한 셋은 이미 수영 대회 경험이 있는 유경험자들이었으며, 둘. 다가오는 대회를 준비하고 있는 예비 출전자이기도 했다. 우와, 다들 멋지다! 나도 언젠가 수영 대회에 나가보고 싶었거든! 내 말을 들은 그녀들은 그게 뭐 어려운 거냐는 듯, 그럼 우리 언제 한번 다 같이 대회 나가자는 말로 나를 설레게했다.
문득 데자뷔가 느껴졌다. 우리가 함께 대회에 출전한 모습이 또렷하게 그려지는 걸 보니, 진짜로 머지않은 미래에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래도 어쩌면 예의상 가볍게 한 말일 수도 있으니 일단 나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러자!
나도 행동력 하나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사람인데, 그녀들을 볼 때면 경이로울 만큼 일이 척척 진행되고 있었다. 만들어진 지 하루 채 지나지 않은 따끈한 단톡방에 S양이 하나의 링크와 함께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이거 나가볼래요?'
링크 속 대회를 설명하는 모집 요강을 보니 수영대회라기보다 수영운동회에 가까운 내용이었지만, 4인 단체전으로 진행된다는 것이 이 대회의 포인트였다.
'헐, 너무 재밌겠다! 당장 해요.'
'우리 아침에 김밥도 사서 가요. 맛있겠다. 히히.'
과연 내가 함께해도 되는 걸까. 머뭇거리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러나 혼자보단 넷, 그리고 그녀들과 함께라면 나 하나쯤은 깍두기가 되어도 너그럽게 봐줄 것 같았다. 내가 대답하기만을 기다리는 단톡방에 결국 내지르고 말았다.
'나도 같이 나갈래!'
그렇게 나의 수영 버킷 리스트에 남아 있던 두 번째 항목, 수영 대회에 참가하게 된 전말이었다.
그 뒤로는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다. 접수 날에 맞춰 빠르게 신청서를 제출하고, 대진표가 확정된 이후로는 대회 준비를 핑계 삼아 우리는 더 자주 모이게 되었다. 부지런한 사람만 먹을 자격이 주어지는 맥모닝을 아침부터 거하게 먹고 헤엄친 날도 있었고, 혼자서는 엄두조차 나지 않던 먼 거리의 스포츠파크에 가본 것도 처음이었다. 나는 수영을 오래 하기만 했을 뿐이지 우물 안 개구리나 마찬가지였다. 수영을 위해서라면 이른 아침 기상도,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는 이 친구들을 따라가는 것이 나는 기꺼웠다. 그녀들의 넓은 세계만큼 내 세계도 넓어져 가고 있었다. 겨우 점 하나가 찍혀있던 내 수영 지도에는 점점 더 많은 점이 찍히기 시작했다.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대회 전날부터 나는 온갖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얘들아, 나만 떨려? 나 일이 손에 안 잡혀.'
'언니, 그냥 놀러 가는 거라고 생각해! 그나저나 대회 끝나고 뭐 먹을래?'
'다치지만 말고, 즐겨요, 우리!'
'근처에 가까운 김밥집 있더라. 김밥은 거기서 사 가자.'
의젓한 동생이 셋이나 있으니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든든함이랄까. 실제로도 대회 당일 덜덜 떨고 있는 내게 담요를 덮어주고, 긴장한 탓에 차가워진 손을 따뜻하게 녹여주고, 잠시 쉬라며 무릎베개까지 내어준 그녀들 덕분에 나는 마지막까지 해낼 수 있었으리라.
대회의 모든 순간이 평생 기억에 남을 추억이지만, 특히 마지막 종목이었던 400m 팀추발 경기는 추억속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이다. 한 명씩 차례로 출발하는 계영과는 달리, 다 같이 일렬로 동시에 출발하는 팀추발은 실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서로의 간격과 일정한 호흡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팀워크가 키포인트라는 뜻이었다. 25m의 레인을 총 8바퀴 왕복해야 하는 이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 우리는 손을 모아 말했다. 다치지 말고, 천천히. 즐기면서!
우리는 사전 연습 때 미리 정해둔 순서대로 레인에 섰다. S양, E양, 나, H양의 순서였다. 출발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모든 레인에서 첨벙거리는 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순간 넋을 잃고 타이밍을 놓칠 뻔 했지만, 금방 정신을 차리고 물속으로 몸을 감춘 S양과 E양의 뒤를 따라갔다. 몇 바퀴인지 세는 것도 잊은 채, 그저 앞사람이 만든 물보라를 맞으며 헤엄쳤다. 숨이 조금씩 차오를 때마다 함께 연습해온 시간을 떠올렸다. 이제 남은 건 서로를 믿고,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물 밖으로 들려오는 종소리가 마지막 바퀴임을 알렸다. 양옆 레인의 잔잔한 물결을 보니, 이제 물속에 남은 팀은 우리뿐이었다. 그래도 우리 넷은 서두르는 일 없이 끝까지 페이스를 맞췄다. 마침내 마지막 주자인 H양까지 무사히 도착하자, 레인 끝에서 우리 넷은 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와, 미쳤다! 진짜 재밌다!
대회의 결과는... 참가한 총 25팀 중 종합 24위를 기록했으며, 그날 점심으로 먹은 비빔밥은 살면서 먹어본 비빔밥 중 가장 꿀맛이었다.
언제 여름이었냐는 듯 더위가 꺾이고, 수영 비수기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가오는 12월에도 추위를 뚫고 수영장에서 만나기로 굳건한 약속을 했다. 내년을 말하기엔 아직 조금은 이른 감이 있지만, 수상 구조사와 생활체육 지도사 자격증까지 함께 도전하기로 했으므로 향후 몇 년간은 계속, 함께 헤엄칠 것이란 뜻이다.
이 글의 끝으로 대회 전날 H양에게 받았던 편지 속, 마음 속에 혼자 담아 두기에는 벅찬 몇 줄을 함께 나누고 싶다.
'저는 요새 수영 배우길 참 잘했다고 계속 생각해요. 우리가 이렇게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우리 넷 다 수영 배우길 참~ 잘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