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야기는 네가 써 내려가야 해. 다른 사람들이 빼앗아가게 두지 마!
<오티스의 비밀상담소> 시즌 4까지의 대장정을 드디어 마무리했다. 2020년쯤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으니 함께한 지도 어느새 4년이다. 그새 나도 많이 변했고 드라마 속 인물들에게서도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정말 다행인 것은 드라마가 끝까지 매력을 잃지 않고 준수하게 마무리했다는 점이다. 숱한 시즌제 드라마들을 보며 재미와 에너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나의 외국 드라마 TOP3는 <웨스트윙>, <굿플레이스> 그리고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가 됐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네 이웃을 너 자신같이 사랑하라.'
너 자신! 우리 자신요! 사랑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남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전에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사랑'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우선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가깝고 시간을 보내는 존재인 나 자신을 사랑하기 어려워한다. 개인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우리의 부정적인 면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반복적으로 그런 측면도 그 자체로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라 말한다. 이는 이 드라마가 굳이 성이라는 주제를 고른 이유와도 연결된다. 우리는 성을 터부시 하는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 조건은 오히려 잘못된 정보들이 활개치고 당사자들은 자기가 잘못된 존재라고 느끼도록 만든다. 그래서 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와 관련된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내 존재를 사랑하는 것에 있어 중요한 과제라 여기지 않았을까 싶다.
두 번째 키워드는 '성장'이다. 이 드라마는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들은 현실적으로는 부모의 관리 하에서 살아가지만 마음으로는 부모에게서 벗어나고자 한다. 필연적으로 시행착오와 갈등 장면이 많이 그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리고 그 영역 또한 자신의 진로, 부모와의 갈등 그리고 친구 관계까지 광범위하다. 하지만 이 드라마를 특별하게 한 것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식이었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꼴불견인 모습들을 보여주다가도 결국에는 자신의 문제와 실수를 외면하지 않는다.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사과를 하고 다음에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도록 시정한다. 부끄러움이나 죄책감에 지지 않고 잘못된 지점들을 당당히 마주하는 모습에서 진정한 의미의 성장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성장의 주체는 청소년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그 예로 시즌 후반부로 갈수록 내가 좋아하게 된 인물인 교장 선생님을 들 수 있다. 이 인물은 아내와 자식을 통제하고 자기 기준에 어긋나는 것에 대해서는 수용하지 않는 가부장제의 화신이었다. 그런 그가 여러 수난을 겪으면서 자신이 살아왔던 인생을 반추하게 되고 그는 기존의 자신과 작별하기로 한다. 가족들에게 사죄하고 실제로 변해가는 모습은 절로 존경심이 들게 했다.
우리가 오래 살면 오래 살수록 반성하고 바꿔야 할 부분들도 더 많이 쌓이기 때문에 변화는 더욱 어려워진다.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를 봐야 한다고들 이야기하지만 인간이 그렇게 합리적 존재는 아니지 않은가? 그걸 해냈음에 대단함을 느낀다. 이런 인물을 두는 것에서 개인은 일정 시점에서 판단할 수 없으며 성인이 되어서도 성장할 수 있다는 이 작품의 관점을 볼 수 있다.
마지막 키워드는 '연결'이다. 이 드라마는 크게 보면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개인들이 하나로 연결되는 일련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드라마 초입부에 주인공인 메이브와 오티스는 잘못된 소문과 소극적인 성격이라는 각각의 이유로 외톨이 생활을 한다. 하지만 상담이라는 매개체로 두 사람이 연결됐고 그 연결망은 점차 학교 전체로 퍼져나간다. 상담이라는 행위는 나의 취약한 모습을 상대에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정말 큰 교감이라 할 수 있다. 내담자는 상담자를 믿고 자신의 문제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서로 간에 당신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감각을 공유하면서 두 개인은 우리가 된다. 이러한 '우리'가 커지면서 단단한 공동체가 되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큰 변화와 성취는 혼자서 이루어낼 수 없다. 사회의 잘못되고 불편한 지점들을 바꾸기 위해서는 다른 이와의 지지와 연대를 필요로 한다. 이 드라마는 교육 문제, 장애인 처우 문제 그리고 성범죄 문제를 위해 학생들이 함께 연대하고 시위하는 장면들을 여러 번에 걸쳐 제시한다. 이슈에 따라 당사자가 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만 이들은 그것에 개의치 않는다. 우리가 함께 싸우기 위해서는 내 문제가 아닌 것에 대해서도 공감하고 함께 목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작품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해 냉소적으로 대하지 말고 함께 공감하자 이야기한다. 그것이 당신이 혼자일 때보다 더 먼 곳으로 데려다줄 것이니 말이다.
이 드라마를 떠나보내며 나도 덕분에 성장했음을 느낀다. 시즌 3을 끝내며 오티스와 메이브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 적이 있다. 두 사람이 이어지기까지 너무 오랜 과정이 걸린 만큼 안정적인 연애를 하기 바랐다. 나 또한 극 중의 오티스처럼 상실을 두려워했고 안정적인 관계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과 성향이 계속 바뀌는 만큼 영원하고 안정적인 관계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결론은 지금 이 시점에 서로 연결됐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하고 떠나보낼 때는 떠나보낼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에릭과 메이브를 놓아주는 과정은 나에게도 하나의 배움이자 성장이었다. 우리가 영영 못 본다 할지라도 우리 몸 어딘가에 서로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표현이 좋았다. 나도 내가 조금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에 감사하다.
오티스에게
나 오글거리는 거 질색이니까 괜히 기대하지 마. 이거 연애편지 아니야.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난 아무도 못 믿었어. 전부 밀어내면 상처받거나 실망할 일 없을 거라 생각했지. 그런 거에 익숙했으니까.
너랑 상담소를 차리고 나서 깨달았지. 도움을 청한 이들 대부분은 사실 교감을 원했다는 거. 그리고 어쩌면 나도 마찬가지였단 거.
네겐 사람들의 진심을 알아주는 귀한 재능이 있어. 내 진심도 알아봐 줬지. 거기다 끈질길 정도로 사람을 좋게 보는 널 보며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 용기를 얻었어. 살면서 처음으로 혼자란 생각이 안 들고 덕분에 더 큰 꿈을 꿀 수 있게 됐어. 우리가 함께할 수 없다는 게 미치게 가슴 아파도 다신 날 고립시키지 않을게. 널 만나 내 마음이 활짝 열렸고 이제 영영 닫히지 않아. 그렇기에 내가 어딜 가든 네 일부를 지니고 갈 거야.
그러니까 내 말은 말이지. 모든 게 고마워, 꼴통아.
다들 널 생각했어. 호프가 너희한테 한 행동이 틀렸다는 걸 알았고 우리가 원하는 무어데일을 위해 다 같이 맞서 싸웠어. 꽤 굉장했지.
그런데 한 편으로는 슬프더라. 왜냐하면 내가 요즘 내 마음을 닫아버렸다는 걸 알게 됐거든. 누굴 돕는 건 내 일이 아니라고 치부했어. 지난 학기에 지독하게 속앓이를 하고 더는 상담하기 싫다 생각했지.
그렇다고 좋은 친구도 되지 말란 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호프가 널 망신줄 때 너를 봤어. 그런데도 나는 괜찮냐고 묻지 않았어. 물어봤어야 하는 걸 아는데 말이야. 정말 미안해
(...)
네가 다신 외계인 이야기를 안 쓰겠다고 결심하더라도 누가 네게 망신 준다고 휘둘리지 마. 넌 훌륭해, 지금 이대로.
안녕, 메이브 지금 전화 못 받는 거 알아. tv 생방으로 너 보고 있거든.
네가 자랑스럽다고 말하려고 전화했어. 그리고 내가 그동안 말도 안 되게 한심했어.
네가 날 좋아한다는 말, 그 말이 너무 듣고 싶었어. 그런데 나는 내가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진짜 옳은 일이 무엇인지 잊어버렸지.
It's you. It's always been you. I love you, Mae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