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을 계속 바라보았다. 신호에 불이 들어오길 멍하게 기다렸다. 바람과 차들의 속력이 나를 다른 공간으로 휩쓸것 같다. 잠시 나는 비현실감을 느꼈다. 내가 서 있는 느낌이 나라는 느낌이 들지 않고 그냥 물건같았다. 기다림은 그냥 지쳐서 포기할 때 내 존재를 묻게 된다. 너는 여기 왜 존재하는 거지? 너는 누구지? 살아간다는 게 뭐지? 내가 기다리는 신호녹색 불빛은 나타나지 않았고 붉은 불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제자리에서 10분을 서 있었고 내 옆 남자가 쓱하고 그냥 길을 건너는 것이었다. 나는 차가 오는지 살피며 황망히 길을 건넜다. 길을 건너고 뒤를 돌아 신호등을 봤는데 여전히 불빛은 깜깜이었다.
고장난 신호등이라는 걸 알아채기까지 10분을 서 있었다. 그냥 길을 건널까도 했지만 그날따라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시간 그렇게 바쁠 일은 없었다. 급한 성질도 그날따라 발휘되지도 않았다.
나는 느긋하며 지루했다. 그리고 생이 좀 그렇듯 느긋하며 지루했다. 내 열정의 신호등이 고장난 것처럼 내 일상도 그랬다. 붉은 신호등 불빛과 녹색의 불빛이 점멸하며 깜박일 때는 초조하고 긴장되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며 최대한 주의와 긴장을 했다. 하지만 나는 고장난 신호등 앞에 서 있는 사람처럼 사고가 멈춘듯 하다.
기억도 휘발성이고 감정도 휘발되고 약속도 휘발되고 의지도 휘발된다. 나 아닌 나로 살아가는 것 같다. 무엇인가를 알려 할 수록 더 오리무중에 빠져버리고 그 무엇도 믿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