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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몽 Feb 15. 2016

공애정

5.옷장 위의 가방

젖은 양말을 신은 것 같은 축축한 날씨다. 우울하다. 서랍에 변변한 양말이 보이지 않아 맨발에 운동화를 신은 기분이다.

침대에 누워 있으면 다리 방향 쪽으로 크림색 옷장이 있다. 그 옷장 위에는 유행이 지난 우중충한 가방이 잃어버린 내 기억의  무게 만큼  옷장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서울 애자언니 아파트에서 충주로 내려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내 기억의 세포를 깨워 줄 키워드를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다.

 나, 공애정이라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알아가는 재미도 있다.

 거실 창 아래 컬러 박스에 진열되어 있는 매니큐어를 보아도 취향이 어떤 지 알 수 있다. 나는 핑크덕후 내지 관심종인거 같다.

 스물 두 개의 매니큐어는 농도의 강약이 있을 뿐 핑크 퍼레이드다.

  나는 2인용 소파에 앉아 그 중 하나를 손톱에 바르고 강한 아세톤 냄새를 맡으며 상실한 기억을 복구하려고  애썼다. 후각을 아찔하게 자극하는 아세톤 냄새 ᆢ

 나의 기억은  꿈틀되는가 ᆢ

형광펄이 들어간 핑크를 손톱에 바르자 덜 마른 손톱의 핑크들이 제 각각 나 핑크야! 라고 소리다.

 같은 색상의 제품이 두 개인 것도 있다. 무난한 색이라 욕심을 낸 것일까

 집안을 둘러보면 핑크와 하트가 자신의 영역을 표시했다.

  핑크수건,컵,쟁반,침구,마우스,접시,블라인드, 옷,욕조슬리퍼ᆢ기타등등

핑크와 협상하지 않은 물건은 거의 없을 정도다.

  나는 물을 좋아하는 식물을 기르고 있다.  물만 잘 주면 잘 자라는  초록식물은 나를 기분좋게 만든다.

 나는 밝은 성향의 여자였던 것일까ᆢ

아니면  회색과 검정매니큐어를  바르고 싶은 지금의 어두운 나일까ᆢ

모르겠다. 감정이 극단과 극단을 오가고 있다.

내가 살았던 공간도 낯설면서도 익숙하고  편하면서도 생경하다. 저글링을 하는 삐에로처럼 감정이 위 아래로 빙글빙글 돈다.

 정말 나는 공애정일까?

 갑자기 그 물음을 던지자마자 속이 울렁거린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식탁의자를 들고 옷장 앞에 섰다. 그리고 짐승처럼 웅크리고 나를 내려다보던 검은 가방을 잡아당겼다.

 순간 가방의 무게에 쓸려 가방과 함께 방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라 머리가 멍했다.

 만약 뒤로 넘어져서 뇌진탕이라도 일어났다면 기억이 되살아날 수도 있었을까?살짝 아쉬움이 남는다.

절망감에  문득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충격요법이랍시고 머리를 박기 위해 착한벽을 찾지 않아도 될 뻔했을지도 모른다.

  멍하게 텔레비전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벽에 머리를 박고 있을 때가 있다. 어느새 내 머리는 북채가 된다. 콩콩콩 쿵쿵쿵 그러다 임팩트있게 탕!

  기억은 더욱 멀어져만가고 통증은 여울져만 간다 이쯤되면 충격요법은 개나 줘 버리고 싶어진다.

  힘을 한방에 쪼개는 바람에 머리에서 쩍 소리가 난적도 있었다. 이러다 기억이 되돌아오기도 전에 머리가 먼저 지구를 떠날지도 모르겠다.


가방의 잠금 버튼을 누르자 딸각 하고 틈이 벌어졌다. 좁은 틈 사이로  상자가 보였다. 힘껏 입을 벌려보았지만 손잡이 아래쪽에  비밀번호 잠금쇠가 있었다.

 네 자리의 비밀번호를 알아야만 가방을 열 수 있다.

 지금의 나라면 비밀번호를 어떻게 관리할까?

 

  고양이가 자신의  앞발로 실뭉치를 이리치고 저리치고 놀듯 나는 두 손으로 큰가방을 돌렸다 세웠다 눕혔다  하면서 스스로 진을 뺐다.

  생일과 전화번호는 아닐 것이다. 나는 막연한 느낌을 쫓아 가방을 데치기했다.

어느 순간, 반짝 스쳐가는 선이 보였다. 짧게 끊어진 선은 가방의 표면에서 이탈되어 내 시선에 박혔다.

 언뜻 낙서 같기도 했지만 3이라는 숫자였다.

3 이 보이고 이어 147 이 눈에 들어왔다.

 3147

비밀번호가 분명했다.

번호를 돌려 맞추자 탁 하는 소리와 동시에 맞물렸던 가방의 이빨이 숨어버렸다.

꽉 다물고 한치의 양보도 용납하지 않던 가방이 입을 쩍 벌렸다.

 나는 비웃하게 웃었다. 사고 이후 처음으로 소리내어 웃었다.

  희망이랄까ᆢ기억의 키워드를 찾으면 나는 기억을 되찾을 수 있겠다는 강한 의지가 솟구쳤다.

 가방 안에는 6미리 테이프와 일기장이 있었다. 나를 발견할 좋은 키워드다.

그리고 또다른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작게 돌돌 말려 고무줄에 묶인 종이 뭉치가 들어있었다.  

 겉면에 손글씨로

ㅡ프랑스

ㅡ뇌를 바꾼다

ㅡ제주도 작업실

ㅡ새로운 나를 위해 화이팅!

ㅡ새로운 경험을 위하여

ㅡ좋은 거 먹자

ㅡ그

한 묶음을 풀어 헤아려보니 한 묶음당 이 백만원 이었다.

 삼 십개의 묶음이니 대략 삼천 만원이 상자안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공애정, 너 뭐니?

 내 돈인데ᆢ 내 돈 같지 않은 느낌은 뭐지?

 아ᆢ나 ᆢ횡재했다

 그리고 고맙다 공애정ᆢ너, 알뜰하게 살아줬구나ᆢ기특해ᆢ


 우울한 하루가 검은 가방 덕분에 한방에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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