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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몽 Dec 19. 2017

루시꽝의 다락방

그리운 엄마

죽음이 불현 듯 찾아와 엄마를 차원이 다른 세계로 데려갔다. 화장터에서 하얀 재로 변한 엄마의 몸을 보았을 때 그저 할 말을 잊은 채 순간 멍해졌다.

 이제 엄마의 몸을 나의 기억 속에서만 볼 수 있다. 기억이 희미해진다면 사진을 통해서 기억에 다시 기억을 입히며 시간을 보낼 것이다.

 엄마가 돌아가셨다. 어디로 가셨을까? 그 세계는 어디일까? 나는 도저히 알 수 없다.

엄마가 죽었다. 죽음은 정지이며 사라짐이며 다시는 볼 수 없음이며 함께 할 수 없음이다. 인정해야 하지만 받아들이기에  버겁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엄마와 영원히 작별해야 한다는 걸 알고 는 있었지만 머리는 이해했지만 마음은 이해 하지 못했나 보다.  

 나는 너무 큰 충격 앞에서는 로보트가 되는 것 같다. 감정이 정지되어 버린다. 울어도 우는 감각이 둔해지는 것 같고, 내가 소리쳐 울면서도 내가 우는 것 같지 않다. 정말 슬퍼서 우는 건지 우는 너가 누구인지 무엇때문에 우는지 이유도 모른 채 그냥 하염 없이 눈물만 흐른다. 흐르고 흐른 뒤에는 눈물도 메마르고, 소리쳤던 목소리는 잠겨서 나올 생각도 안하고 이상하게 말도 나오지 않는다.

  소리쳐 울고 싶은데 주위는 조용하고 나 혼자 몸부림 치기에는 눈치가 보인다. 그래서 자중해서 우느라 좀 답답했다.

 나는 장례식에서 엄마를 이웃집 할머니의 죽음처럼 남의 죽음처럼 흘러 보냈다. 문득 울음이 복받쳐 흐느껴 울었지만 감정이 하수구 막힌 듯 꾹꾹 끊어진 울음이 나왔지만 슬픔이 분수처럼 폭포처럼 터져 나오진 않았다.

 나의 슬픈 감정은 분말처럼 흐뿌려졌다.

건조한 가루로 허공에 멀찍히 퍼졌다. 건조하게 더욱 건조하게...

나는 일상의 일들 밥먹고 화장실가고 이런 일련의 행동을 평상시와 다름없이 수행했다.

그리고 간간히 광고문구처럼 빨갛게 엄마의 죽음을 끼어 넣었다. 나에게 그렇게 알렸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듯

더욱 메마르게 웃었다. 회피.

동해에서 버스를 타고 충주로 오는 동안 바깥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그냥 오로지 나와 메마른 감정만 그리고 쓸데없는 일상적인 대화만 있었다.

 이런 내가 정상인것인가.

엄마와 내가 떨어져 지낸지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부터이니 30년은 되는 것 같다. 엄마와 같이 있었던 때는 엄마가 다리 수술로 병간호한다고 병원에 한달 조금 있었던 게 가장 오래 같이 보냈던 시간이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엄마가 아플 때 간호하는 것이 전부였다. 나의 형제들이

 엄마의 생일에 모인 기억은 단 하루였다.

엄마는 오남매를 생일 때 따로 봤을 것이다.

직장문제로 그 어떤 각종의 이유로 ...

엄마를 자주 찾아가지 못했던 이유에서는 거리도 있었고 경제적 이유도 있었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엄마는 한 아저씨를 만나 함께 살았다. 엄마는 엄마대로 엄마의 인생을 사시려고 했다. 그래서일까. 연락은 가끔하지만 엄마와   더욱  형제들과는 거리가 생겼다.

 엄마는 5년 정도는 안정되게 행복하게 사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머지 시간은 들쑥날쑥 여러 일들을 겪기 시작하면서 힘들어 하셨다. 하지만 끝까지 동거남과의 관계를 이어갔다.

 엄마에게는 자식보다 오히려 큰 의지처였던 것이 분명했다. 엄마가 죽을 뻔 했을 때마다 병원에 데려다 준 분은 가까이 있었던 엄마의 동거남이었다.

 이미 다커버린 자식이 엄마의 남자를 새아버지라고 부르기에는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억지로 불러보아도 잘 안되어서 결국 아저씨라 부른다.  아저씨는 혼인신고가 되지 않은 채 엄마와 살고 있었고 단지 동거인으로 되어있었다.

엄마의 말로는 이웃사람들에게는 사촌 동생이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엄마와 아저씨의 관계도는 그리 녹녹치 않은 것 같았다. 엄마가 심장병으로 수술중 사망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의사가 보호자 사인을 요구할 때 아저씨는 그냥 자신의 손만 만지작 거리며 나를 쳐다보아야 했다.

 그때 나는 아저씨의 슬픔을 보았다. 어쩌면 가족이 될 수 없는 거리를 아저씨는 철저히 깨달았던 것 같다.

 엄마가 원했고, 아저씨도 동의 했던 바라 그것을 불만할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관계설정되어져 시작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런 면에서 확실했던 거 같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오빠는 엄마를 화장했다. 평소 엄마의 소원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꽃이 활짝 핀 들판에 뿌려 달라고 했다고 그래서 그렇게 할 거라고 했다.

 아버지 산소 옆에 엄마가 묻힐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실소했다. 정말 엄마의 속마음도 그랬을까...

왜 나는 엄마의 속마음이 보이는 걸까?

엄마는 나에게도 화장을 운운했지만 그것은 그냥 포기에 가까웠다.

혼자 살아내지 못하고 다른 남자와 살았다는 이유로 엄마는 결코 아버지 곁에 묻힐 수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아저씨와 엄마는 아버지 묘지에 가서 벌초도 하고 그랬고 엄마는 그런 아저씨를 나에게 자랑하듯 전했다.

 아버지에게 미안하지 않으려고 애쓰셨던 거 같다.

엄마는 아저씨에게도 아버지에게도 그 어느 누구에게도 갈  수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화장을 해달라고 평소 말했던 것일까.

나는  엄마를 꽃핀 들판에 뿌리는 것이 싫다.

엄마의 묘소가 있다면 좋겠다. 남들처럼 찾아가 볼 묘지가 있다면 좋겠다.

오빠는 엄마의 평소 유언을 잘 들어주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엄마가 바라시는 대로 해드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무엇이 바람직한 것인지...

나도 내 생각만 하는 걸까?

나도 나만 생각했다. 엄마가 그렇게 빨리 갑자기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 언제나 아프셨던 것처럼 아프셨다가 나으실 거라고 생각해버렸다.

엄마는 뭐든 잘 참았고 잘 이겨내서 아주 강한 분이라고 생각했고, 엄마는 부지런하고 깡다구도 쎄고 그래서 언제나처럼 다시 웃으실 거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내가 힘들어 할 때마다 잘 할 수 있을거라고 격려해주셨다.

그런데 이제 격려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힘들다고 포기하지 말고, 북한군이 총들고 너를 죽인다고 위협하는  각오로 정신 차려서 살아라"

엄마가 나에게 해줬던 말 중의 하나다.

엄마는 그런 정신으로 뭐든 해냈다고 하셨다.

엄마는 초등1 나이에 6.25를 겪었고, 깡통 들고 밥을 얻으러 다녔다고 했었다. 엄마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놓치 않으셨다.

다리가 아픈데도 시니어클럽에서 운영하는 곳에 가서 일을 하셨다.

 그 돈을 꼭꼭 모았다가 목돈을 만들 희망에 살맛을 느끼셨다.

엄마는 그랬다. 돈 없으면 못 살거 같다고.

돈 없으면 살맛이 안난다고..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맛에 우울증도 날아가 버린다고 했다.

나는 그런 엄마가 항상 대단해 보였다.

악착같이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게 엄마의 신조였다.


엄마... 나도 악착같이 열심히... 살아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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