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돌아온 지 44일째다.
다시 나의 집으로 돌아와 늘 해 먹던 미역국을 끓이고, 돈가스를 잔뜩 만들어 두고, 된장찌개도 몇 번 끓이다 보니 메뉴가 바닥난 것 같다. 한국에서 돌아와 한 달 정도는 칼질하고 국을 끓이며 제육에 불고기까지 요리하는 시간이 한참 즐거웠다. 그런데 이제 그 “쇼”도 끝난 모양이다. 메뉴가 바닥났다.
바닥난 걸 들키기 싫어 한국 슈퍼에서 해장국, 시래기 된장국, 육개장, 소갈비탕, 더덕무침, 들깨나물무침 같은 밀키트를 사다 나르며 또 하루 이틀을 버텼다. 하지만 결국 들켰다. 냉장고 털어 먹다 보니 어제는 김밥을 만들었고, 그 전날은 아이키아 미트볼에 그레이비 스팀 야채까지 그것도 냉동이지만 저녁메뉴로 온 힘을 다 써버렸다. 그리고 오늘, 정말 내놓을 저녁거리가 없었다.
건너 건너 친구에게 ‘팬케이크 선데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마 일요일마다 팬케이크를 먹는 전통을 만든 모양이다. 예전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어떻게 한 가지 음식을 매주 같은 날 먹지, 질리지도 않나?’ 하고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그 말이 자꾸 귀에 맴돈다.
뻔해 보이는 전통. 철마다 낙엽처럼 떨어지고 쓸려 버려지는 이민 생활 속에서 전통이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일 같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메뉴가 바닥난 주방 10년 차가 되고 보니, 차라리 우리 집에도 하나쯤 이어지는 전통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사실 가족에게 “이번 주부터 팬케이크 선데이야”라고 말해도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왜 나는 그 전통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그렇다면 전통은 꼭 있어야 하는 걸까?
메뉴가 바닥난 요즘, 오히려 이어질 전통 하나쯤을 바라게 된다. 내일은 또 뭘 해 먹나 고민하면서. 차라리 ‘불고기 쌈밥 금요일!’ ‘된장찌개 수요일’ ‘김밥 토요일’ 그런 건가..? 습관처럼 사 오던 코스트코 스테이크와 연어. 늘 스테이크는 남편이 구웠는데, 이번엔 내가 혼자 구워봤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잘 구워지는지. 남편이 자기보다 더 잘 굽는다며 칭찬하는데, 괜히 내 일이 하나 더 늘어난 기분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레스팅이 잘 된 건지 내가 더 잘 굽는다. 며칠 전 한번 해 먹고 한 덩어리가 남아 오늘도 스테이크를 구워야 하나 고민하다가 문득 ‘스테이크 샌드위치’가 떠올랐다. 웹서칭을 해보니 마요네즈에 다진 마늘을 섞고, 캐러멜라이즈 한 양파를 넣는 게 핵심이라는 걸 보고 또 주방 불을 켰다.
빵을 굽고, 버터를 발라 준비하고. 스테이크를 올리브유에 구워 소금과 후추. 겉은 바삭하게 속은 촉촉하게. 중간쯤 익었을 때 버터 툭. 껸지며 나머질 구웠다. 스테이크 레스팅 하는 동안 빵 위에 겨자씨를 펴 바르고 사선으로 자른 얇은 스테이크를 겹겹이 올려 그 위엔 흑설탕과 바사믹으로 조린 양파 올려 알리오 올리 마요를 툭. 그리고 체더치즈 한 토막. 그 위에 아삭아삭 겹겹이 양상추 올려 무화과잼을 한 덩어리 올린 후 빵으로 덮었다. 당연히 맛있었지.. 생각보다 많은 양의 으깬 마늘을 넣었는데 향이 거의 나질 않고 개운했다. 남편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눈을 굴린다. 맛있다고…바닥났던 메뉴 위에 작은 불씨가 살아난 것처럼, 요리할 의욕이 10퍼센트쯤 다시 올라왔다.
캐나다 땅 위에 서 있는 반복되는 이 전통 없는 삶이 어떤 날은 차갑고, 어떤 날은 땅 아래에서 누군가 은근히 불을 지피듯 따뜻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또 살 만하네, 하고 한숨 돌리며 살아간다. 그래도 팬케익 선데이는
아직 도전 못해볼듯 하다.
스테이크 샌드위치는 정말 왕 추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