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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백 Jan 06. 2020

매일 다른 일기를 쓴다는 것

 일기를 쓰는 게 예전처럼 재미있지 않다. 자주 말문이 막혀 한두 줄도 겨우 써 내려갈 때가 많다. 괜스레 지난 일기들을 뒤적여보니 죄다 비슷비슷한 일과들로 채워져 있다. 구불구불, 의욕 없어 보이는 글씨들. 이 글씨체에 이름을 붙여보자면 ‘마지못해체’ 라는 이름이 적당할 것 같다. 이 ‘마지못한’ 일기들은 해의 중반을 넘어가며 띄엄띄엄 해지더니, 연말인 지금은 거의 백지와 다름없다. 

 

 이마를 콩콩 쥐어박으며 다이어리를 노려본다. 12월인데도 새것과 다름이 없다. 이니셜까지 새겨가며 제작한 비싼 다이어리인데 그 속은 단출하다 못해 궁핍할 지경이다. ‘출근함’이라는 글씨와 ‘퇴근함’이라는 글씨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매번 ‘간밤에는 잠을 설쳤다’라는 핑계로 시작해 ‘너무 피곤하다’라는 말로 끝맺어진 일상은 그야말로 시시포스의 삶이 따로 없다.



출근, 퇴근, 출근, 퇴근, 피곤하다, 출근, 퇴근, 피곤하다 ... 다시 출근



 세상에,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난생처음 성 밖에 나와 백성의 가난을 목격한 공주님처럼 충격에 빠졌다. 내 일상이 이렇게 가난하다니! 올해가 가기 전에 반드시 이유를 찾아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김영하 작가가 말했듯, ‘기록한다는 것은 조수간만처럼 끊임없이 침식해 들어오는 인생의 무의미에 맞서는 일이기도’하니, 나 역시 일상의 기록을 되찾음으로써 무의미에 맞서야 했다.  


  일상을 잡아먹은 범인을 찾겠다며 눈에 불을 켜고 고군분투하던 중 한 권의 책을 만났다. 책에게 꾸중을 듣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자신의 대표작인 <월든>에서 이렇게 일갈한다. 



  자기가 갖고 있는 지식을 쉬지 않고 이용해야 하는 사람이 어찌 자신의 무지를 기억해 낼 겨를이 있겠으며,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겠는가?


 소로우 식대로 이야기하자면, 이 헐겁고 무의미한 일상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쉬지 않고 이용’하는 데서 비롯된다. 매일 비슷한 식사를 하고, 여러 갈래의 길들 중 늘 가는 길만 골라 걸어가며, 귀에 익은 노래를 따라 부르고, 망설임 없이 같은 노선의 출퇴근 버스에 올라타는 것. 익숙한 일터에서 숙련된 업무를 처리한 후, 별일 없이 하루를 마쳤다며 안도하는 삶. 늘 비슷한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오늘도 어제와 비슷하게 피곤하며, 그리하여 주말마다 게을러지는 삶이다. ‘숙련성이란 관리된 빈곤화다.’라는 롤랑 바르트의 말도 이와 같은 맥락이 아닐까.



 하지만 달리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출퇴근 시간은 정해져 있고, 회사는 늘 그곳에 있다. ‘일한지가 몇 년인데 아직 이런 것도 모르냐’며 불을 뿜는 상사 앞에서 ‘아는 일만 하면서 살아서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뻗댈 수는 없지 않은가. 새로운 음식에 도전했다가 실패해서 소중한 식사시간을 망치고 싶지도 않고, 모르는 길로 들어섰다가 길을 잃고 싶지도 않다. 소로우처럼 숲으로 들어가 두문불출할 수도 없고… 산 넘어 산이라니, 다시 원점이다.



  ‘몰라서 제대로 못 사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어쩔 수 없으니까 이렇게 밖에 못 사는 거였어. 하하!’ 

툭툭 털고 포기하려는 찰나, 영화 <패터슨>이 나를 다시 잡아 앉힌다. ‘아는 것’을 활용해 일상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삶’을 사는 방법이 있다고, 이 영화는 말한다.



이미지 출처 _ 네이버 영화 <패터슨>


  

<패터슨>의 주인공 패터슨은 버스 운전사다. 매일 같은 버스를 몰아 같은 길을 돌고, 늘 같은 동료들과 비슷한 안부 인사를 나눈다. 집으로 돌아오면 아내와 저녁을 먹고, 개를 산책 시키고, 맥주를 마신 후 잠에 든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똑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그렇다면 패터슨도 밤마다 같은 일기를 쓰며 머리를 쥐어뜯을까? 그럴 리가. 그는 나보다 백배쯤 더 멋진 사람임이 틀림없다. 무려 ‘시’를 쓰니까! 패터슨의 촘촘한 시선은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도 시어를 건져 올린다. 언어를 통해 일상은 반전되고 각기 다른 색으로 빛난다. 그에게 하루하루는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실은 천양지차였을 것이다. 


  ‘일기장 대란’에서 시작해 <패터슨>까지 이어진 여정 이후, 나는 전보다 더 곰곰해진 눈으로 주변을 들여다본다. 보다 높은 화소, 넓은 화각을 품어보고자 소설책과 시집을 번갈아 펼쳐보기도 한다. 일기장에 ‘일정’을 빡빡하게 적는 대신, 미흡하나마 ‘일상의 시’를 적는다. ‘모든 소란은 결국 뭐라도 얻을 수 있게 해준다’는 박연준 시인의 말을 떠올리며, 나 역시 2020년 새 ‘일기장(일상의 시 기록장)’을 펼친다. 








문장 속 책들


<읽다> _ 김영하

<월든> _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소란> _ 박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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