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연애, 늙어버린 소개팅
nn번째 소개팅.
토요일 10시, 알람없이 눈을뜨고 시계를 본다. 빨간점을 하나 씩 지우고 카카오 뉴스를 본다. 별 내용은 없다. 오늘 내일 기사로 월요일 주식 장이 또 요동치겠네. 언제 빼지.
뒤척이다 일어나 화장실로 가 거울을 본다. 거울엔 전날보단 붓기빠진 내 쌩얼이 무표정하게 나를 보고 있다. 그래도 새로운 사람을 보는 날이니 수분팩 하나 하고 잔 게 효과가 있었나보다. 그렇게 양치를 하고,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린다.
옷장의 옷을 꺼내본다. 여름옷 겨울옷이 뒤죽박죽 섞여 난장판이다. 뭘 입어야 하나. 지난 소개팅에 입었던 원피스를 입을까, 아님 이번엔 블라우스를 입고 갈까. 어차피 상대방은 내가 뭘 입어도 처음이니 그냥 제일 깨끗한 옷이나 입고가자. 그렇게 나는 지난 소개팅에도 입었던 원피스를 입는다. 친구들은 자신이 본 연애 유튜브에서 바지는 절대 안된다고 했다면서 바지를 고르던 나를 극구 말렸다. 옷을 고를 때마다 그 생각이 나서 피식 웃는다. 그러다 씁쓸한 표정으로 주섬주섬 원피스에 몸을 넣는다.
잘 바르지 않던 톤업 크림에 파운데이션을 섞어 얼굴에 톡톡 문지른다. 귀찮아. 전화가 온다. 친구다. 스피커폰을 켜고 친구와 잡담을 한다. '오늘은 어떤 사람이 나온다니, 뭐 하는 사람이니, 어디 산다니, 이번엔 느낌이 오니' '근데 왜 이렇게 부질없지. 이젠 기대도 안된다 야.' 스피커폰 너머로 친구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화장을 한다. 앗, 눈썹 잘못 그렸다.
친구의 응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고 나갈 채비를 한다. 향수를 뿌린다. 직원이 추천해 준 트랜디한 향수인데 난 잘모르겠다. 좋다고 하니 뿌려본다. 냄새가 지독하다. 조금만 뿌릴걸.
도착지까지 1시간. 15분 일찍 나왔는데 눈 앞으로 지하철이 지나간다. 배차간격이 15분이다. 거지같은 타이밍. 예감이 좋지않다.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하나. 의자에 앉아 지하철을 기다린다. 톡으로 조금 늦을 것 같다는 연락을 남긴 후 이북을 켠다. 이북엔 스테디 셀러며 요새 밀어주는 책들이며 온갖 것들이 쏟아진다. 스킵하고 내가 읽었던 책의 페이지를 편다. 시간이 금방 간다. 지하철이 온 것도 모르고 읽다 하마터면 놓칠 뻔 했다. 텍스트를 보며 지하철에 올라탄다. 올라탄 지하철엔 사람이 꽤 많다. 다행히 앉을 자리는 있었다. 좌석에 앉아 다시 폰을 켜다 주변을 살펴본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커플이 있다. 나들이를 가나보다. 남자는 한 손은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한 손으로는 여자친구의 손을 잡고 있다. 여자친구는 반대쪽 팔에 자그마한 핸드백을 메고 기둥을 잡고 있다. 연노란색 원피스가 참 잘 어울린다. 서로를 마주보는 네 개의 눈이 반짝거린다. 여자가 배시시 웃는다. 배시시 웃는 여자를 보고 남자도 웃는다. 남자는 여자가 귀여운 듯 여자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저 둘은 도착지가 어디든 간에 꽃밭이겠네 하고 생각했다. 참 예뻐보였다.
저런 연애를 해본 게 언제였더라. 마음이 헛헛하다. 나는 이미 찌들어버렸는데 저 순수한 마음이 내 가슴을 콕콕 찔렀다.
날이 너무 덥다. 걷기만 해도 땀이 찬다. 적어도 10분 여유있게 도착하려 했는데 늦어버렸다. 카톡을 보니 벌써 와있단다. 뛰어갈까 걸어갈까 하다 그냥 늦고 몸을 보전하기로 했다. 기분이 좋진 않았다. 걸어가는 길은 조금씩 긴장과 설렘이 뒤섞인다. 그래도 좋은 사람일수도 있어. 착하고 배려심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늦는 것도 이해해주는걸. 내가 마음에 들지도 모르지.
식당에 들어가 예약자를 확인한다. 상대방의 뒷모습이 보인다. 음. 저 사람이구나. 내가 오늘 저 사람과 밥을 먹는구나. 아. 무슨 이야기를 해야하지. 아. 반복될 것 같다.
어색한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는다. 살짝 서로를 살펴본다. 5초의 첫인상. 이 때 첫 인상이 오늘을 결정한다. 이미 마음은 80% 굳어졌다. 바로 메뉴판을 본다. 아무거나 시키고 싶다. 어차피 뭐든 무슨 맛인지 모르니까. 무난한걸 시키려고 했는데 이런, 먹물 리조또를 시켰다. 최악이다. 내 실수다.
플레이팅한 음식들은 참 정갈했다. 정갈하다 못해 너무 적었다. 샐러드에 스테이크에 리조또 그냥 무난한 음식들이었지만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리조또는 차마 입에 넣지도 못했다. 그냥 그 분이 다 먹길 바랐다.
이야기를 하며 서로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본다. 집은 어디고 고향은 어디며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며, (어차피 대략은 다 알지만)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속얘기를 털어놓듯, 오늘 볼 사람이 아닌 것마냥 시시콜콜하게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서로 궁금하진 않아도 이게 시간을 떼울 수 있는 적당한 방법이니까. 서로에 대한 질문거리가 사라질수록 대화 시간은 줄어든다. 서로의 신상을 다 알아낸 후 시사 취미 등의 이야기를 나눈다. 뻔한 래퍼토리다.
자리를 옮겨 카페로 간다. 상대방이 밥을 샀으니 내가 커피를 샀다. 나는 배고파서 주스를 시켰다. 주스는 맛있다. 내가 사서 더 맛있는 것 같다. 사실 밥먹는 꼴이 맘에 들지 않았을 때 나왔어야 했을텐데, 무슨 일말의 미련인지 카페까지 갔다. 혹시 모르니 혹시 모르니 하고 말이다.
안하느니만 못한 대화가 이어졌다. 대화가 길어지면 사람의 가치관이 드러난다. '무례하다. 건방지다'가 내가 상대에게 느낀 최종의 인상이었다. 나이가 많은 만큼, 회사 경력이 많은 만큼 갖게되는 의식이 있나보다. 나는 그게 퍽 싫었다. 나를 어린 아이처럼 보는 것도 싫었다. 대화를 하며 생각보다 많은 생각이 오갔다. 그래, 이 정도 나이가 되면 사람이 다 이렇게 변하는건가 하고 말이다. 근데 아직 상대의 찌듦을 받아줄만큼 나는 그렇게 늙지 않았다라고 생각했다. 만나기 전에 나눴던 카톡 태도와 다른 것도 너무 싫었다.
내가 연상을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순수함보다 안정감을 찾았던 이유는, 벚꽃보단 소나무같은 사랑을 하고 싶어서였다. 관계를 오래 지속하면 할 수록 순수함은 어차피 닳고 달아 세상의 쓴맛과 섞여 그저그런 추억으로 사라지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럴 바에 조금은 화려하지 않더라도 수수하게 관계를 이어나가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걸 알고 시작했지만 아직 난 순수하고 화려한게 더 좋나보다. 부장님과의 회식같은 만남을 뒤로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버스를 탔다. 지하로 내려갈 힘도 없었다. 좀 돌아가도 집으로 바로 가는 버스를 타고 싶었다. 나는 마치 관광버스를 탄 것 마냥 깊게 잠이 들었다. 너무 피곤했다.
열정없이 툭 건네는 '잘 도착했어요?'라는 카톡은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고, 나 역시 '네~ 오늘 즐거웠어요.'를 마지막으로 카톡을 끝냈다. 으~른의 연애는 이렇게 어렵다. 너무 많은 것을 거쳐갔고, 또 앞으로도 많은 것이 지나갈 걸 안다. 조건과 상황 타이밍 그리고 뜨뜨미지근한 온도로 이어지는 관계는 정말 재미없다.
에이 부질없어. nn차 소개팅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