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우연 Sep 29. 2016

취향의 유토피아

청소년에게도 기호식품 하나 정도는 필요하다. 중학생이던 나에게는 엄마 몰래 먹는 학원 자판기 커피가 그랬다. 크림커피, 밀크커피, 설탕커피, 가끔은 400원짜리 바닐라 카푸치노까지. 골라 먹는 재미가 있었다. 물론 곧 그 네 가지 선택지는 물렸다. 그러던 언젠가 프리마가 듬뿍 든 크림커피 한잔과 우유 한잔을 섞으면 어떨까 싶었다. 비커의 용액을 옮기듯이 부단히 섞은 다음 마셨다. 귀에서 쌍투스가 울렸다. 그렇게 크커유(크림커피+우유), 코피(코코아+커피) 등의 메뉴를 개발해냈다. 두 잔 중 한 잔은 좋아하는 친구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건내기도 했다. 소금의 농도를 재는 수학 문제는 매번 틀렸지만, 커피 농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맞추고 조합했다.


그렇게 취향을 학습했다. 커스터마이즈할 수 있는 스타벅스와 커피와는 달리 기계가 만들어내는 커피였지만, 그 안에서도 어린 나는 어떻게든 취향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사실 취향은 그 자체로 근대적 시민의 자랑스러운 상징이다.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감각의 섬세화를 문명화 과정, 특히 궁정화의 산물로 설명한다. 폭식과 폭음을 일삼던 중세의 호전적 전사들은 궁정에서 귀족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점차 취향의 섬세함을 평가하게 됐다. 이 세련된 궁정 취향은 훗날 시민계급에 받아들여지고, 민주주의와 시장주의의 확산을 통해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퍼진 셈이다.


누구나 자신의 취향쯤은 읊을 수 있는, 취향의 유토피아를 꿈꾼다. 취향이 없는 사람은 자의든, 타의든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한 사람이다. 특히나 전자는 매력이 없다. 직접 만든 플레이리스트 대신 멜론 탑100에 올라온 음악만을 듣고, 뭐 먹겠느냐는 질문에 아무거나를 입에 달고 다는 사람이다. 자신의 선택회로를 정교히 설계하지 않았으니 일상생활의 선택도 더뎌진다. 결국 옆 사람을 지치게한다. 이런 사람은 더 나쁘게 말하면 게으르고 부박하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 재밌어하는 것, 아름다워하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은 그것을 나누어주는데 역시 인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친 나를 종종 즐겁게 하는 음악 취향 역시 각각 쳇 베이커, 나스, 마빈 게이를 좋아했던 옛 애인과 친구들로부터 물든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취향이 피곤해졌다. ‘있어빌리티’가 만들어낸 피로감이다. 요즘 20~30대 사이에서 학벌, 직업과 같은 신상을 내보이지 않는 익명 모임인 느슨한 공동체가 유행이라고 한다. 지역, 취향, 취미를 중심으로 모이되 서로의 신상에 대해 간섭하거나 침범하지 않는 것이 규칙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취향은 그 자체로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가 돼버린다. 미하엘 하네케나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좋아하면 괜찮지만, 해운대를 좋아하면 은근 무시당한다고 한다. 취향으로 인한 구별 짓기는 부르디외 시대의 것처럼 노골적이지는 않더라도, 여전히 은밀하다. 


내가 꿈꾸는 취향의 유토피아는 구별 짓기의 사회가 아니다. 누구나 취향 하나쯤은 품을 수 있는 세상, 타의로 취향이 거세당한 사람이 없는 사회를 꿈꾼다. 때론 노동이 고되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 취향을 어색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에게 취향의 선택지를 차근차근 쥐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 전, 늘 ‘가성비’만을 추구하는 우리 엄마를 최근에야 스타벅스에 함께 데리고 갔다. 어색해하는 엄마를 부추겨 우유의 종류부터 휘핑과 드리즐의 정도까지 주문하는 법을 알려줬다. 커피를 좋아한다는 엄마지만 집에서 내려 먹는 값싼 원두커피와 편의점 커피 말고 다른 커피를 마시는 적을 본 적이 없던 탓이다. 달뜬 엄마의 얼굴을 오래간만에 보았다. 내 가족과 친구들이, 궁극적으로는 모든 이들이 시민으로서 당당하게 취향을 표명하는 세상이 오길. 그것이 자판기 커피이든, 스타벅스 커피이든 말이다. 





오랜만에 입사용 작문... 그냥 글이라면 더 썼을 개드립들이 많지만...논술만 쓰다보니까 간만에 머리가 말랑해져서 좋았다. 

아, 작문 주제는 '최근 곳곳에서 커피 자판기가 현저하게 사라지고 있다. 자판기 커피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해 보자.'였당. 

작가의 이전글 8월 마지막 주에 읽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