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나와 앨리스>
우린 보편적 감정에서 특수한 감정을 배우기도 하고 특수한 상황에서 보편적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영화 <하나와 앨리스>는 짝사랑의 감정을 다각도로 연출하며 한 사람의 성장을 그린다. 흐릿하게 다가왔던 짝사랑의 감정은 여러 상황을 마주하며 점차 윤곽을 잡게 되고, 고유의 문양을 갖게 된 감정은 한 사람의 개성이 되어 그 사람을 성장시킨다.
단짝과 같은 남자를 좋아하게 된 소녀들의 황당 코미디 로맨스라는 외피를 입은 영화 <하나와 앨리스>는 이성에 대한 첫사랑을 주된 이야기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는 첫사랑, 짝사랑으로 치환될 수 있는 다양한 범주의 감정을 품고 있다. 처음 단짝이 된 친구, 오디션, 의지와 무관하게 점점 멀어지는 가족의 형태 등의 상황에서, ‘내 마음과는 달리, 어쩔 수 없게 놓치게 되는’ 모든 것과 그 감정이 처음 시작될 때의 설렘, 당혹 등을 잘 녹여낸 영화이다.
상실은 무언가를 잃을 때 생기는 감정이라지만, 때론 소유하지 못한 것에서 더욱 큰 상실감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는 그걸 짝사랑이라고 부른다.
써보지도 못하고 서랍 깊숙한 곳에 뒀다가 나중에 한 번씩 발견하곤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만년필, 어른들끼리 이미 정해버린 이혼 절차 속에서 가끔 만나게 된 아빠, 엄마의 애인 앞에 옆집 소녀 행세를 해야 하는 상황, 짝사랑하게 된 선배, 연이어 낙방하는 오디션. 그 모든 것은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짝사랑의 감정들이 도사리는지 보여준다.
단짝 친구인 하나와 앨리스는 고등학생이 된다. 하나는 학교 선배인 마사시를 짝사랑하게 되고, 마사시가 머리를 다친 상황을 이용해 그가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거짓말하게 된다. 거짓말의 부피는 점차 커지고, 결국 하나가 마사시의 현재 여자 친구이며 앨리스는 마사시의 전 여자친구라는 이야기로 거짓말이 완성된다. 이에 앨리스는 얼결에 하나의 연극 놀이에 가담하게 되면서, 존재하지 않는 마사시와의 추억 놀이를 시작하게 된다. 앨리스는 마사시를 데리고 예전 데이트 장소라며 여러 곳을 누비는데, 그 장소는 사실 앨리스와 그녀의 아빠가 함께 다녔던 추억의 장소들이었다.
부모님이 이혼한 후, 앨리스는 가끔 아빠를 만난다. 아빠는 예전과 달라진 자신의 식성을 모를 만큼 뜸한 사이가 되었고, 엄마는 애인이 수시로 바뀌는 철없는 연애를 이어간다. 그리고 연애 상대에게 앨리스를 옆집 아이라고 속이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앨리스는 가족의 포근함이 아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주변인의 삶을 살게 된다. 급기야 하나의 말도 안 되는 연극 놀이에 동참하게 되고, 점차 마사시에 대한 감정도 생기기 시작하면서 단짝 친구와 삼각관계에 놓이게 된다.
앨리스도 모르는 새 시작된 연극 놀이에서 앨리스는 주연이 아니다. 하나를 위한 조연으로, 하나가 정해준 결말을 향해 연기를 이어간다. 이 황당한 연극은, 어쩌면 우리의 삶을 축소해 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린 주인공이 아닐 수도 있고, 때론 이미 정해져 있는 결말을 달리면서도 다른 결말을 꿈꾸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길에서도 우리는 감정을 느끼고 깨닫는다.
앨리스의 거짓 추억 여행이 결국 마사시에게 들키게 되면서 소녀들의 연극 놀이는 끝나게 된다. 모든 사실을 터놓고 난 후, 앨리스는 마사시를 좋아하는 마음을 애써 숨긴 채 ‘워 아이 니’라고 중국어로 사랑을 고백한다. 그런 후 중국어를 모르는 마사시를 향해 ‘짜이찌엔’이라고 인사를 하며 첫사랑을 마무리한다.
앨리스가 마사시에게 건넨 중국어는 아빠에게 배운 문장이었다. 언제 만날지 기약도 못 한 채 아빠와 인사하면서 앨리스는 ‘워 아이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빠는 헤어질 때 ‘짜이찌엔’이라고 알려준다. 그렇게 앨리스는 ‘짜이찌엔’이라는 말을 배웠다. 아빠에게 얼결에 뱉은 ‘짜이찌엔’과는 다르게 두 번째로 말하는 짜이찌엔은 그녀가 끝맺은 인사말이다.
마사시라는 첫사랑 상대를 통해서 아빠와의 관계가 다시 한번 새겨진다. 이렇게 점차 변하고 성장해 가는 앨리스의 성장 과정은 영화 초반에서부터 시작된 앨리스의 오디션 탐방기와 여정을 함께 한다.
우연히 길거리 캐스팅으로 회사에 들어가게 된 앨리스는 회사에서 정해주는 대로 여러 곳에 오디션을 보게 된다. 처음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녀의 오디션을 보고 누군가는 비웃기도 하고, 다른 이의 열정과 재능에 자기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하고 돌아오게 되는 모습이 순차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앨리스가 첫사랑을 정리하고, 하나와의 우정을 지키며 아빠와의 추억을 간직하게 될 만큼 성장한 시점에서는 드디어 앨리스가 자신을 선보이는 오디션을 보게 된다.
아무나 뽑아도 된다는 식으로 대강 진행되던 오디션장에서 앨리스는 제대로 발레를 보여도 되겠냐고 물으며 주변에 있던 종이컵과 테이프를 이용하여 토슈즈를 만들고 발레를 선보인다. 몇 분간 진행되는 발레 장면은 주변인이기만 했던 앨리스가 자신의 공간을 무대로 만들고 주변의 사람을 자신의 청중으로 만듦으로써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장면을 연출한다.
앨리스를 보며 깨닫게 된다. 주인공이 아닌 순간에도 우린 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