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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사 Jul 03. 2023

나중에 정의되는 기억도 있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

  시간이 지나 깨닫게 되는 기억도 있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의 주인공은 2살 때 부모님의 죽음을 목격한 후 말문이 닫혔다. 그런 그의 삶은 익숙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새로운 것 없이 반복되는 일상은 더 이상 어떤 기억도 허용하고 싶지 않다는 몸부림과도 같고, 그 견고함은 닫힌 말문만큼이나 단단하게 오래 지속되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프루스트 부인을 만난다. 기억을 찾아주는  프루스트 부인의 허브차와 마들렌을 먹으며 주인공은 기억을 하나씩 되찾게 된다. 그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기억의 파편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제대로 마주하면서 주인공의 삶은 다시 시작된다.      


  어떤 기억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쥐고 있다가, 2년이 지난 후에야 친구 앞에서 엉엉 울며 털어놓았던 적이 있다. 처음으로 가슴 뛰는 일을 발견했다. 그때의 난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고, 극단에서 연기를 배우는 한 달이 내내 빠짐없이 행복했다. 처음 공연을 할 땐 가장 먼저 엄마에게 초대장을 드렸다. 무대에서의 모습을 자랑하고 싶었다. 연기를 못마땅해하던 엄마도 내 모습을 보고 나면 인정해 줄 것 같았다. 연극은 무사히 마쳤고, 엄마에게 받은 꽃다발도 친구들의 편지도 모두 좋았다.      


  그렇게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다음날 엄마는 내게 말했다. ‘네가 계속 연극을 하겠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너한테 아무 재능도 없어서 참 다행이더라.’ 가장 아픈 말을 골랐다는 것을 알기에 되려 아무렇지 않은 척 먹던 밥을 마저 먹었다. 억지로 밥을 욱여넣으며 식탁 위의 꽃다발을 바라봤다. 졸업식 날의 꽃다발처럼, 이제 연극은 끝이라는 의미로 준 것이었나. 참 예쁜 마침표를 선물 받았던 거구나 생각하며 억지로 한 그릇을 비워냈다. 그리고 2년이 지나서야 가장 친한 친구에게 엉엉 울며 그날의 그 짧은 문장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얼마 전, <인어아가씨>라는 오래전 드라마가 방영되는 것을 보았다. 드라마에는 결혼 문제로 갈등을 겪는 모녀가 등장한다. 결혼을 반대하는 엄마는 딸이 남자친구에게 주려고 밤새 싼 도시락을 발견한다. 나는 드라마를 보며 ‘저 도시락 던져지겠네.’라고 말했다. 그러자 엄마는 답했다. 그렇게는 못한다고. 왜? 그렇게 반대하는 데, 도시락 던지거나 버려버리고 그냥 외출금지 시키면 되지. 딸이 밤새 열심히 싼 걸 어떻게 버려. 엄마는 그렇게는 못하지.      


  온갖 독한 말로 딸의 행동을 막으려는 엄마는 고작 도시락 하나를 버리지 못한다고 했다. 그제야 그날 받았던 꽃다발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엄마는 연극을 준비하겠다며 수시로 밤샘 연습을 하고, 내내 연극 대본을 붙잡고 있는 내게 잔소리도 하고 말려보기도 했지만 내 연극은 보러 와 주셨다. 꽃다발까지 사서 말이다. 엄마의 눈에도 그날의 연극은 소중했던 것이다.      


  내겐 마담 프루스트 부인도 기억이 되살아나는 마들렌도 홍차도 없다. 그래서 오랜 시간 아주 서서히 기억을 수정해나가게 된다. 나의 해석으로 가득 찬 그날의 기억들이 사실은 어떤 의미였는지, 그날의 기억에서 내가 돌아보지 못한 다른 사람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천천히 배운다. 어쩌면 인생은 매번 예습과 복습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비슷한 극에서 매번 다른 역할로 열심히 마주해 나가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여러 방향에서 극을 바라보고 나서야 전체의 의미를 어렴풋 알게 된다.     


  그때 난 독하게 말하는 엄마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차가운 그 표정을 보면 금방 울어버리거나 무너져 버리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내 마음의 형태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그래서 보지 못한 그 표정은 아마 조심스러웠을까. 딸의 행동을 막으려 모진 말을 뱉으면서도 딸의 정성은 소중히 다루는 몸짓과 닮았을까.     


  계속 외면하고픈 이야기는 아직도 존재한다. 그러나 멋대로 생각한 그 기억들의 내막을 알아가는 과정이 삶이기도 하다. 이런 과정이 삶이라면 조금 더 용기 내 살아가야겠다. 많은 기억을 버리거나 묻어두지 말고 살아가야겠다.      


  저마다 지키는 기억이 있다. 새어 나올까 숨기느라 지키기도 하고, 소중해서 지키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를 지키는 기억도 존재한다. 이제 알게 된 어떤 진심은 나를 지탱해 주는 또 다른 기억이 된다.      


  쓰지 않은 일기와 찍지 않은 많은 사진들이 우리 머릿속엔 담겨있다. 그것이 어떤 빛을 내는지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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