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그래도 마파두부 먹을 건데요?
마구니가 꼈구나, 마구니가 꼈어
그게 꼭 잘못됐다거나 되게 이상하다거나 그지 같다거나 해악을 미칠 만큼 끔찍한 건 아닌데 그냥 좀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는 이유로, 느낌적인 느낌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외되는 경우. 잘못된 것도 아니고 이상한 것도 아니고 그지 같은 것도 아니고 끔찍한 것도 아닌. 선택권자의 타이밍에 맞지 않을 때 등장했으며 선택권자의 느낌적 느낌도 당최 알 길이 없었던 ‘제외자’는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가. 너무 억울해 하진 마세요. 소중한 당신께 아차상! 을 드립니다^^~ 내지는 조금만 더 노력하시면 언젠가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따위의 위로 같지도 않은 위로들에 아, 예, 뭐, 어쩔 수 없죠, 이해합니다^^ 하고 탄맛 같은 씁쓸한 미소만 띠고 그냥 괜찮다고 넘어가도 되는 건가?
너무 많은 경우에 우리는 궁예가 되어야 한다. 시대의 트렌드에 날카롭게 반응하며 늘 내가 등판해도 팽 당하지 않을 최고의 타이밍을 알고 있어야 하고 가장 힙하고 췰하며 쿨한 취향을 유지하면서 이런 느낌, RGRG? 하고 찡긋 윙크도 날려 줄 여유. 유행을 읽고 심지어 때로는 선도할 수 있는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게 무슨 을지로 한복판에서 외쳐! 뉴욕 트리뷴! 내가 하면 모든 게 힙! 하고 자빠지는 소리냐. 우이씨 그게 그렇게 잘 되면 왜 내가 선택’되어야’하는 입장에 있겠냐! 그냥 이젠 내가 내 리듬대로 이 세상을 움직이게쒀! 하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결국 선택 되어짐의 갈림길을 피할 수는 없다.
과거 우리가 ‘놓쳤던’ 보석 같은 존재들이 요즘에서야 재발견되고 있다고들 한다. 양준일 이라든가, 추대엽 이라든가. 이제라도 그들이 이 시대가 원하는 느낌적 느낌을 살려 딱 맞는 때 재등장해줘서 너무 기쁜 일이다, 역시 꾸준히 참고 노력하다 보면 좋은 날이 오는군요! 같은 말을 하려는 게 당연히 아니다. 선택되지 못했던 때에도, 그리고 다시 재발견되어 선택되고 그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때에도. ‘선택되어짐의 기로’가 주는 탄맛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아주 한 끗 차이로 선택되어지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언제 다시 한 끗 차이로 팽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계속 남을 것이다. 삶은 요컨대 선택과 제외 사이의 위!아래!뒤!뒤!아래! 위!옆에!아래!…플로우의 연속일지도.
태어날 때부터 우리 모두는 발 아래 ‘선택되어짐’ 이라는 짐을 한 가득씩 매달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짐은 세상으로부터 선택이 되어질 때마다 조금씩 줄어들어서 수면 위로 우리를 끌어올려 주는데, 아무리 발버둥 처 봐라, 그게 어디 줄어드나. 온전히 내가 아닌 바깥 영역에서 결정되는 일이라, 온전히 그 영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선택받는 게 쉽고 자주 일어나는 이들의 발걸음이 그토록 가볍고, 그래서 물색이 없고, 우울한 축축내가 나지 않는 게 그래서 일지 모르겠다.
“넌 오늘도 혼자 다른 거 먹을 거지?” 점심 식사를 함께 갈 때마다 내게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었다. ‘넌 왜 다들 선택하는 거 피해서 꼭 다른 걸 선택하니? 참 별나다. 왜 그런 선택을 해서 다른 사람들은 취향도 없는 평범한 사람인 것처럼, 자기 선택권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만드니? 그리고 메뉴 통일하면 음식도 빨리 나오고 얼마나 좋아’라는 타박이 집약된 게 저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유별난 척을 하는 건가? 선택되어지지 않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결국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네? 나까짓게 뭐라고 나만의 선택을 하고 있냐? 짜장면보다 마파두부를 꼭 먹어야하만 하는 절체절명의 이유가 있는 건가? 왜? 점심시간이 짧아지는 게 그렇게 싫었던 건가? 등등의 생각이 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휴, 내가 궁예였다면 이렇게 사는 게 힘들진 않았을 텐데. 마구니가 너무 많이 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