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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현 Jan 02. 2021

오, 나의 크라비

 


 샤워를 하고 나왔다. 먼저 준비를 끝낸 정호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노을을 보기에는 해가 꽤 많이 넘어간 것 같았다. 그래도 길을 나선 김에 해안가 쪽으로 가보기로 한다. 이 곳 기준으로 비수기라서 인지  거리에 사람이 붐비지 않았다. 식당에도 많아봐야 두세 팀이 앉아있는 것이 전부였다. 유행이 지난 오래된 관광지 같았다. 그런 것들과 상관없이 정호와 나는 시종일관 떠들며 길을 걸었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라고 하기엔 무척 자연스러웠으며 아주 오랫동안 함께 해온 사람처럼 보였다. 







 해안가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이야기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마, 아니 확실히 본 적이 없는 세상이다. 핑크와 보라 그 사이 무수한 색으로 가득 찬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바다는 하늘의 색을 이미 닮아 영롱했으며, 해안가에 드문드문 서있는 사람들의 그림자마저 준비된 하나의 작품처럼 보였다. 

람빵의 노을은 힘차고, 해의 마지막을 붉게 태웠다면 아오낭 비치의 노을은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같은 것이었다. 너무나 로맨틱한 하늘이었다. 우리는 맥주를 손에 쥐고 계단 끝에 걸터앉아 그 아름다운 선물 같은 것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신이 존재하는 걸까. 인간에게 축복을 내린다면 이런 모습일까. 더없이 소중할 한 장면을 오랫동안 한가득 담았다.




 여행지를 추억하는 데에는 많은 요소들이 있다. 음식, 경험, 사람, 자연 같은 카테고리들로 그 장소를 추억하기도 하고 마음의 별점을 매기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크라비는 나에게 각 부문별 최고점에 가까운 점수를 얻은 도시이다. 좋은 사람을 만났고, 이전의 모든 시간을 용서하게 했던 노을과 나른한 해변가, 숲길을 다니는 듯한 드라이브 길. 조금은 뜨거웠지만 지내는 내내 화창했던 하늘.


크라비에 오기 전 푸켓에서 친구와 다툼이 있었고 깊은 생각도 계획도 없이 이 곳으로 달려왔다. 밤늦게 도착한 게스트하우스. 재밌게도 프론트 직원은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었고, 손님 중 한국인 남자가 한 명 더 있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지친 몸은 여러 생각을 할 겨를을 주지 않았다. 얼른 샤워를 하고 곯아떨어졌다. 아침햇살은 눈부심을 너머 오늘 하루 많이 뜨겁겠구나 싶었다. 휴게실에 앉아 그제야 크라비를 검색해보고 짐을 챙겨 일단은 아오낭 비치부터 가기로 한다. 한참 조식을 먹고 있는 데 옆에 앉아있던 동양인이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두세 번 정도 말을 오고 간 후부턴 내 영어는 한계를 빠르게 맞이했다. 그때 그 친구가 한국말로 "한국어료 말하묜 편해요?"라고 했다. 나는 얼이 빠져 멍 때리다가 겨우 뱉은 말이 "한국어를..잘하시네요?" 였다. 





정호와의 첫 만남이다. 정호는 미국에 살고 있는 재미교포 2세였다. 그와 크라비에서 하루하고 반나절 정도를 보냈지만 우리는 꽤 잘 맞았다. 큰 계획 없이 이동하는 것. 우발적으로 무언가 시도해보는 것들. 느낌으로 맛집을 알아보는 것 그런 사소한 여행 포인트가 잘 맞았다. 정호는 젠틀했고, 개그코드도 나와 쿵작이 맞았다. 

첫날부터 우리는 해변에서 비키니와 트렁크를 입고 물놀이를 했다. 계속해서 휴양지에 있던 탓인지 착장이 썩 그렇게 부끄럽지는 않았다. 다음날은 오토바이를 빌려 dragon crest로 향했다. 네이버 블로그에서 크라비를 검색하면 주로 아오낭 비치와 그 근처에 관한 정보만 나오는 데 구글에서 크라비를 검색하면 훨씬 넓은 반경으로 다양한 관광지가 나온다. 그건 크라비뿐만 아니라 대부분 도시에서 그랬고, 네이버 블로그를 사용할 때는 포토스폿이나 한국인들이 너무 많을 것 같은 장소를 피하기 위해 이용하곤 했다. 드래곤 크레스트로 향하는 길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가로수길이 펼쳐져 있는 것처럼 열대 나무로 드라이브 로드가 멋있게 펼쳐져 있었다.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마음을 홀딱 빼앗겼다. 





드레곤 크레스트는 산꼭대기에 있는 장소였다. 즉, 등산이 시작되었다.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갔지만 생각보다 등반하는 길이 길었고, 정상에 다다를 때는 꽤 가팔랐다. 그래도 나름 산 오르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다람쥐로써 정호에게 지지 않고 씩씩하게 올랐다. 등산은 보상이 확실한 편이다. 꼭대기에 올라서면 그 벅참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날따라 날씨가 아주 쾌청해 크라비의 전체가 선명하게 내려다 보였다. 그림 같은 구름들도 눈높이 근처에 머물며 장면을 가득 채웠다. 




크라비에서 마지막 날은 정호와 함께 피자와 맥주를 먹었다. 우리는 다음 행선지가 달랐다. 나는 태국에서 이미 한 달 반 정도 지냈고, 일주일 정도 후에 친구와 호치민에서 만날 예정이라 그 사이에 빈 시간을 캄보디아에 갈지 태국남부로 갈지 고민하던 참이었다. 정호는 다음 행선지로 코사무이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나에게 같이 가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코사무이라... 한국에서는 신혼여행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었고, 그 때문에 애초에 여행지 리스트에도 넣지 않았던 곳이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 갈 기회가 이렇게 갑자기 훅 들어온다고? 그럼 당연히 가야지. 기회인가 보다 싶었다. 우리는 맥주잔을 부딪히며 다음 여행지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마음으로 들떴다. 



https://www.youtube.com/watch?v=hLIz_1G2Jo4&t=49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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