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눈이 많이 내려서 춘천을 갔다.
한동안 우울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렸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울감에 몸부림쳤다기보다는 허무감에 괴로웠다는 것이 더 알맞은 표현이다. 이젠 우울감 자체가 나를 힘들게 하진 않는다. 다만 무엇도 의미가 없게 돼버릴 때에 문제가 생긴다. 우울감도 행복함도 다 부서질 아무 의미 없는 감정 나부랭이 같은 것들이라는 생각이 한번 들기 시작하면 혼자서 그 진흙탕을 빠져나올 길이 없다. 병원에서 늘 하는 이야기 중 하나다. 내 존재를 탐구하거나 이유를 찾는 것 따위는 하지 마라고. 어차피 답 없이 꼬리에 꼬리만 무는 질문 들일뿐이다. 사춘기도 아니라서 한번 철학적 상념에 빠져들게 되면 주로 진이 다 빠진 채 울먹이며 내가 어디 있는지 더듬거리게 될 뿐이다. 잘 안다. 잘 아는 대도 머리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팔이 무겁고, 머리가 고꾸라지고, 살기 위한 최소한 것들만 하고 잠만 자는 하루들. 배터리가 방전되기 전에 충전을 했어야 했는데 꼭 꺼지고 나서야 병원을 찾는다. 약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안정이 되고 뿌듯하다. 나를 구할 것은 이제 약뿐이다.
친구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었다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쓴다. '그래 어젯밤 나 춘천 가기로 계획했잖아..' 아주 오랜만에 혼자 멀리 나서려고 하니 괜한 불안감이 몰려온다. '내가 혼자서 얼마나 잘하는 사람이었는 데 말이다...' 이렇게 겁이 날 때는 꼭 용기를 내려고 한다. 지금 주저하면 영원히 그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기거나,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고정되어버릴까 봐 두배, 세배의 용기를 내어 일을 해내곤 한다. 뭐.. 그렇다.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본다. 새하얀 눈이 꼼꼼히 쌓여 있는 것을 보니 흡족스럽다. 서두르지는 않되 여유롭지는 않게 준비하여 집을 나선다. 최근에 왔던 눈 중에 가히 최고의 적설량인 것 같다. 시간을 확인하고 나선 덕분에 지하철을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앉을자리도 있고 말이다. 이제 춘천에 대해 알아볼 시간이다. 지난밤 지하철 노선도만 펼쳐놓고 목적지를 정한 탓에 춘천을 간다는 것 외에 행선지 같은 건 없다. 인스타를 뒤적이다가 네이버에 춘천을 검색한다. 사실 여행할 때 내 취향은 sns보다 구글링이나 해당 도시의 홈페이지나 관광청 홍보물 같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춘천 관광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박물관이니 김유정 생가 등 클래식한 관광지가 잔뜩 나온다. 그중에 눈에 든 것은 '청평사'. 보자마자 마음이 두근거렸다. 이 곳을 가기 위해 내가 춘천을 선택한 거구나. 절을 좋아한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적고, 낮고 아름다운 건축물, 그리고 삶과 죽음 그 사이에 있는 듯한 향내가 좋다. 어릴 때 엄마를 따라 절에 가면 법당에 앉아 한참이고 법당 뒤에 그려진 그림과 부처상을 찬찬히 들여다보곤 했다. 절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닌 공간처럼 느껴졌다. 인간에게 허용된 다른 차원 공간 같은 것 말이다.
용산에서 내려 같은 플랫폼에서 itx-청춘 춘천행을 탔다. 기차를 타니 역시 조금 실감이 난다.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 20살 여름엔 일본으로 첫 배낭여행을 떠났고, 23살 봄에는 9일 정도 전국 배낭여행을 했다. 25살 가을에 독일로 떠나 오페어 비자로 4개월을 지내며 유럽 곳곳을 여행했다. 27살 생일은 홀로 베트남에서 기념했으며 28살 초봄에 동생과 보홀섬에서 호화로운 언제나 꼭 다시 가고 싶은 리조트 휴양을 보냈다. 28살 초여름에는 계획에도 없던 동남아시아 대장정을 시작하게 되어 102일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29살 겨울 보라카이로 떠났다. 무려 남자 친구와 이별여행으로 말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을 이야기들. 여행에 진심인 여자. 여행을 못 가서 정말 병이 나버린 여자. 그래서 여행을 앞으로 인생의 업으로 삼겠다고 한 여자. 먼 여행을 떠나겠다고 했더니 어떤 이는 도피가 아니냐 물었다. 나도 한때는 여행을 가는 것이 도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꾸밈없이 여행이 좋다. 여행이라는 세상에 사는 것이 마음이 가장 안정되고 편하다. 세상을 보는 것이 내 존재와 연결이 된다. 도피가 아니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인 것이었다. 오랜 여행을 떠나기로 다짐했다. 어떻게 될지 모를 인생에 정통으로 맞서겠다는 무서운 계획인 것이다.
기차는 넓고 편했으며, 창밖은 줄곧 새하얬다.
역에서 내리니 생각보다 춥다. 날씨 어플에 온도가 그리 낮지 않아서 적당히 입고 갔더니 나름 강원도라고 텃세를 부리나 싶다. 가는 길에 봐 뒀던 식당으로 향한다. 걸어서 20분 정도라 천천히 걸어본다. 파주만큼이나 눈이 많이 내렸다. 별 다를 것 없는 골목들을 지나지만 기차를 타고 이만큼 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인지 괜히 이곳저곳이 흥미롭게 보여 카메라를 든다. 걷다 보니 집에 그리울 때까지 한동안 돌아다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 닿는 곳곳으로 말이다.
식당을 도착해 문을 열었더니 주인들이 나만큼이나 내 등장을 어색해한다. 서로 어색해하는 광경. 메뉴는 몇 개 없다. 대표 메뉴를 하나 시킨다. 비주얼이 새롭거나 독특하지는 않다. 음식은 조미료로 어쭙잖게 흉내 내는 맛이 아니고, 잘 만들어 낸 한 그릇이다. 뿌듯한 한 끼. 주변 사람들을 보니 남은 국물에 밥을 비벼 먹는 것 같은데 오랜만의 여행이라 그런지 괜히 목소리가 나지 않았다. 밥을 먹으면 너무 더부룩할 것이라는 스스로 핑계를 대고 서둘러 식당을 나온다. 지도 어플에서는 식당 가까이에 있는 역에서 버스를 타면 청평사까지 1시간 10분이 걸리지만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다고 나온다. 그런데 간과한 것이 있다. 시골에서는 특정 루트에 한해서 버스를 여러 대 운영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다시 들어가서 보니 버스가 1대 운영 중이라고 한다. 즉, 이 버스를 타고는 오늘 안에 청평사를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놀란 마음에 네이버에서 찾아보니 소양강댐으로 가 유람선을 타고 가야 한다고 한다. 젠장.. 보나 마나 한참 거릴 것 같다. 시간은 벌써 오후 2시다. 불안한 마음에 절에 냅다 전화를 건다. 오는 방법은 유람 선뿐이라고 한다. 그 마저도 시간대가 얼마 없으니 선착장에 전화해서 시간을 확인해라고 일어주셨다. 현재 가장 빠른 배편은 3시, 절에서 나오는 마지막 배편은 4시 30분 배였다. 지금은 2시 반, 이곳에서 소양강 선착장을 가려면 최소 1시간은 걸리는 데... 때마침 그곳을 가는 버스도 내 앞의 역을 지나간다. 정말이지 동시에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겨울의 여행은 이런 일이 빈번하다. 해가 짧아 무엇이든 금방 문을 닫고 고로 하루가 짧다. 하루를 자기로 결정한다. 도미토리는 2만 원이면 구할 수 있다. 편해진 마음. 손이 시린 참에 보이는 시장으로 들어간다. 적절한 곳을 찾았다. 모자와 장갑, 양말 같은 것이 가판대에 잔뜩 있는 골목이다. 물론 주 고객층에 맞춰 조금 올드한 디자인이지만 보통 이런 곳에 보석들이 숨어있기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무지의 레트로 감성에 어울릴법한 베이지 컬러 장갑이 삼천 원이다. 그 자리에서 바로 사면 호구다. 가판대의 끝까지 가본다. 가판대마다 그 장갑이 있지만 색깔은 조금씩 다르다. 가장 마지막 집에서 베이지와 회색 장갑을 두 개에 오천 원에 구입한다.
아 여행은 실패해도 성공해도 여행이라는 것으로 추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