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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현 Feb 18. 2021

소중해 마지않는 그 해 여름

북큐슈


학식을 먹는 내내 티비에는 일본에 대단한 쓰나미가 덮쳤다는 속보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당시 나는 옆 나라 어딘가의 재난보다 새내기로서 하루하루 학교를 버텨내 가는 것이 더 고난이었고, 재난이었다. 과정은 불편했지만 결과는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에 다행히 한 학기를 마쳤다. 여름방학이 왔고, 인생의 첫 알바를 하게 되었다. 대학가에 새롭게 오픈한 치킨집에서 알바생을 대거 구한다는 팜플렛을 보았고, 그곳에서 평일 오후 서빙을 하게 되었다. 소름 돋게도 그때를 생각하면 해를 피해 가게 안으로 뛰어들어와선 바깥과 대비되는 시원한 온도에 몸을 식히던 장면의 냄새가 기억난다. 일은 그 어느 때보다 재밌었고,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 할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일본 배낭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동행자가 없었다. 당시 20살이었고, 주변 친구의 부모님들 중에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20살 여자아이를 외국으로 여행 보낼 부모님은 없었다. 이제 와서 궁금하지만 부모님은 어떻게 겁도 없이 나를 일본으로 보내신 걸까. 나의 부모님은 여행 계획서를 써오라고 하셨고, 내 여행 예산이 90만 원이었는데 50만 원짜리 배낭가방을 사주셨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그냥 엄마 카드로 플렉스 한 거 지만 말이다. 동행자는 함께 알바하는 친구였다. 문제는 남자였다. 개방적인 부모님이었지만 차마 남자아이와 단 둘이 여행을 가겠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거짓말을 했고, 우리는 출발했다. 







북큐슈를 일주일 정도 크게 돌기로 했다. 부산에서 후쿠오카는 배편으로 4시간이면 갈 수 있었고 우리는 밤에 출항해서 새벽에 도착하는 크루즈를 타고 떠났다. 갑판 위에 올라가 온통 검은 바다 한가운데서 작은 불빛이라도 찾아보려 했던 그 밤을 잊을 수가 없다. 후쿠오카는 아주 더웠다. 몇 발자국만 걸어도 셔츠가 땀으로 다 적셨고,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여행 초보자에겐 숙소의 위치 따위를 확인하고 예약할 기본적인 노하우도 없었다. 나중에는 방 두 개를 예약했는데 방 하나에 침대 두 개가 있는 방을 예약해 놓기도 했었다. 여행 중 만나는 사람은 당연히 우리보다 어린 사람들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아기 여행자로 불렸다. 지금 내가 그때의 나를 만나더라도 그렇게 불러주지 않았을까. 


























첫날은 항구에서부터 계속 마주치던 오빠가 동행했다. 아무래도 별생각 없이 무작정 온 것 같은데 우리의 계획에 숟가락을 얹으려고 했던 것 같다.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고,  뭘 하든 흔쾌히 따랐다.  자신의 인도에서의 연애 경험담을 끊임없이 정석이와 나의 썸 가능성으로 대입하려 들었다. 그도 그때는 25밖에 안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석이는 일본말을 거의 할 줄 몰랐다. 히라가나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상태인 반면 나는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자연스럽게 내가 안내자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중요한 건 안내자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고 정보를 얻고 혼자 생각하느라 정석이를 까먹기 일수였다. 혼자 휑 하고 길을 가버리거나 통역해주는 것에 게을렀다. 그래도 우리 착한 정석이는 불평 없이 나를 잘 따라다녔다. 내가 복이 많았던 게지. 




8월의 큐슈는 후쿠오카뿐만 아니라 모든 도시가 더웠다. 얼마나 더우면 정석이와 '덥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점심을 사기로 내기를 할 정도였다. 그리고 주로 내가 샀다. 아니 나만 샀다. 

우리가 주로 구경하는 것들은 사원이었다. 한국과 비슷하면서도 좀 더 화려한 표현방식이 뚜렷했다.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몰랐지만 그저 이쁘구나 하고 돌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사실 나는 그런 관광지나 유적지를 가는 것보다 일본 사람들에 섞여 그들의 대화를 훔쳐보거나 눈치를 보며 장을 보는 그런 일상적인 경험이 훨씬 즐거웠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일본 드라마에 빠져있던 탓이다. 


숙주가 한가득 쌓여있던 라멘, 전차에서 먹던 녹아버린 아이스크림, 어마 무시했던 태양을 피해 그늘만 쫓아다니던 것, 도미토리에서 만난 사람들, 길을 물어봤을 뿐인데 입구까지 안내해주던 아주머니, 맛이 없었던 우동.모든 것이 소중해서 기회가 된다면 그곳을 다시 조용히 거닐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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