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서
호주로 워홀비자를 가지고 떠나기 한달 반 전, 아버지께 허락을 빙자한 통보를 했고, 돌아온 것은 아니나 다를까 폭언이었다.
'너가 지금까지 제대로 한 게 뭐냐'
'거기 가봐야 너 잘 될 수가 없다'
'정말 한심한 생각이다'
미리 대사를 준비하지도 않고서 어떻게 그렇게 막힘없이 말씀 할 수 있으신지. 난 그게 경이로웠다. 타격은 없었다. 애초에 아버지가 쉽게 응원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나에 대한 아버지의 평가는 근거없는 판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씀하시는 동안 꿈틀거리는 정도의 반박은 했지만 의미있는 행동은 아니었고, 좋은 결과를 얻고자 한 행동도 아니었다. 그런 저녁식사 시간이 흘렀고, 나의 통보는 포기하는 걸로 알고 있겠다는 아버지의 말씀으로 정리 되었다. 물론 포기는 없다. 내가 언제부터 부모님 뜻에 따라 살았다고... 어떻게 하면 아버지에게 상처를 덜 줄 수 있을 지 그런 것들만 고민하게 되었다. 내 결정은 흔들림 없으니까. 드디어 고난의 산을 하나씩 넘어가기 시작하는 때가 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부모님과 의견대립을 가지면서까지 내가 호주 워홀을 가려고 했던 이유는 사실 그냥 '경험' 정도였다. 독일에서 오페어 비자로 4개월 지내면서 유럽여행을 종종했고, 28살 퇴사 후 100일 가량 했던 동남아 배낭여행 동안에도 영어를 제 1언어로 사용하는 나라를 가본 적이 없었다. 막연한 호기심이 생겼고,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생활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설레는 계획이 생겼다.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시점이 동남아 배낭여행을 막 갔다 온 후인 19년도 말, 코로나가 퍼지기 시작한 그 때였다. 이전에 경험 한 적 없는 팬데믹이였고, 그냥 지나가는 그런 일 중 하나지 않을까 생각하며, 20년도 2월에 호주 워홀 비자를 승인받고, 3월 초에 떠나는 비행기 티켓까지 구매를 완료했다. 출발 일주일 전 호주의 락다운으로 비행기는 돌연 취소되었고, 나는 큰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모아둔 돈은 바닥을 보인 지 한참인데 그 마저쓰며 락다운이 풀리기를 막연히 기다리는 게 맞는 건지, 일단은 생활을 위해 어디든 취업을 하는 게 맞는 건지 판단이 쉽지 않았다. 코로나는 쉽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정확히 3년 후 3월, 나는 호주로 떠나게 되었다. 시간 속에서 갈팡질팡하기도 했지만, 워홀을 가지 않았을 때의 내 아쉬움은 그 어느것도 대체 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에 나름의 준비를 하여 3년전보다 조금은 더 나은 상태로 오게 되었다. '나은 상태'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간 그래픽 디자이너로 직업을 바꾸기 위해 공부를 했고, 디자이너로 취업하여 1년의 경험을 쌓은 후 프리랜서로 전향한 상태로 왔기 때문이다. 호주에 당장 도착했을 때 나는 한국에서 외주를 받고 있는 상태였고, 또 새로운 작업을 할 수 있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호주에서 잡을 구하는 것에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3년 전 계획이 무너졌을 때는 세상을 보는 눈이 정말 비관적이었고, 가지 말라는 하늘의 뜻인가? 하는 생각까지 하며 절망에 갇혔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호주에 가지 못한 것이 너무 감사하다. 그 시기의 호주는 락다운으로 호스피탈리티잡이 거의 씨가 말랐던 상태였다. 영어가 능숙하지도, 커피를 만들지도 못하는 나는 잡을 구하는 것 조차도 힘들어 경제적 문제에 시달리다가 기회와 시간만 날리고 고생했을 것을 생각하면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찔하다. 3년이라는 시간동안 내가 잘 준비한 이유도 있지만 우연히 얻은 그 시간이 너무 감사하다. 이럴땐 시간만큼 마법같은 일이 있을까싶다.
현재 나는 호주에서 4개월을 지냈고, 5개월차에 접어들었다. 오지카페에서 일한 지 한달이 되었고, 디자인 외주를 병행하며 생활하고 있다. 이렇게 힘겹게 오게 된 호주에서의 생활은 아쉽게도 마냥 좋기만 하진 않다. 한국에서 하던 비슷한 고민들을 여전히 하고, 한국에서만 지냈다면 못 느꼈을 것들까지 얹어서 폭 넓고, 깊은 고민들을 하게 되었다. 도저히 어딘가 써내려가지 않으면, 감당을 못할 수준의 용량까지 차버린 것 같아 하나씩 풀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