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조금 특별한 한해를 보낸 것은 확실하다. 19년부터 계획했던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실천하는 한 해였고, 다행히 기대의 80%는 만족 할 수있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23년 마지막날 역시 저녁 일마치고 돌아와 샤워하고 와인에이드 한잔 들이키며 올 한 해 일기를 들춰보는 데, 역시나 혼자 열심히 씨름했던 시간들이 보여 정리를 조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14년도에 처음으로 우울증 센터를 방문했고, 16년도부터 일련의 공황발작을 겪었으며, 18년도 겨울부터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약물치료와 상담을 받아왔다. 중간에 긴 해외여행을 가거나 일시적으로 괜찮은 시기를 제외하곤 호주로 오기 전까지는 매일 두번 우울증 약을 복용했다. 현재는 약을 전혀 복용하고 있지 않은데 완벽히 괜찮아서 라기보다는 약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정도의 환경 속에 지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우울증 환자들은 어떻게 살아내는 지 궁금하기도 한데 그걸 찾아 볼 여력도, 용기도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나를 탐구해본다. 나만 탐구해본다.
2023.5.4_작고 단단한 돌멩이
몸집이 커질 수 있게 살을 덧대는 쪽으로 방향이 향했다면, 작지만 단단하게 뭉친 덩어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오늘이다. 날개를 달고 날고싶다는 생각을 항상 해왔는데 나이가 드는 건지 몸집을 부풀리기보다는 빈틈없이 단단한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렬해진다. 이러다가도 몇번씩이나 바뀔 마음이라는 것 알지만 말이다. 무튼 지금, 이시간의 나는 그렇다는것!
2023.5.19_무제
내 우울의 근원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겠는데 인정하자니 인정하면 안되는 부분인 것 같고, 인정을 한다해도 개운 할 것 같지는 않다. 내 마음의 근거는 어디일까. 이 마음에 논리는 없고, 몸은 뚝딱거린다. 나는 늘 마음이 살랑살랑하여 괴로운 사람이다. 가벼운 마음만큼 뻔뻔하지 못하여 괴로운게 더 정확하겠다. 지금처럼 이렇게 내가 나를 꼭 안고 이렇게 살아내야지! 내가 나를 더 위해주고, 미래의 나를 위해 힘든 일은 미리 해주고 그런거!
2023.8.17_어느날 나에게
이유없이 자주 울고싶은 요즘이야. 이전보다 스스로를 달래고 혼자 지내고 소리지르지 않는 것에 익숙해져 가지만 그런 무던함과 별개로 슬픔은 자주 찾아와. 아마 내 깊은 우울감 때문일수도 있고, 이유는 잘 모르겠어. 우울함이 이전에 내가 겪었던 그런 종류는 아니라서 크게 걱정하지는 않아. 다행이지. 며칠전 그런 불안함이 스쳤어. 내가 요즘 많은 것들을 큰 소란없이 조용히 넘길 수 있는 것은 어떤 수준의 차분함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정도의 일만 발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그런 막연한 불안함이 스치더라. 폭풍전 고요함같은 그런 건 아닌지. 어쩌면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인것 같아.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버틸 수 있을 때까진 유지해볼 것 같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또 잘 지내자.
2023.9.28_방어력 제로의 하루
감정이 복잡해서 글을 쓰지 못하는 날이 있다면, 그런 날이 존재한다면, 글을 쓸 수 있는 날은 일년에 며칠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울증은 참 괴로운 병이다. 참으로 교묘해서 과연 이 놈을 이길 수 있는 날이 올까 싶은 아주 치사하고 치밀한 녀석이다. 누구나 사회생활을 해야하는 거니까 그 점을 인질로 마음껏 아프지도 못하고 자기 잘못이 아닌 내 탓을 하게 하고 느닷없이 들이닥친다.
2023.11.12_울먹울먹한 하루
오늘은 쿨타임이 다 찼는지 아침부터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인생이 원래 거친 건 알고 있었지만, 받아들이고 잘 살고 있지만,
문득 억울하고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어 속상하고 힘이 나지 않았다.
가끔은 그냥 넘어가기도 하고, 운이 좋게 해결 되기도 해야하지 않냐고.
어째 모든 일들이 이 악물고 해내지 않으면 안되냐고.
그것도 해결되는 것들이면 다행이다.
아무쪼록 마음이 텁텁하고, 비좁은 날이다.
일은 어떻게든 잘 해결 할것이고, 묵묵히 하루를 잘 살아내면 그것으로 된것이니 너무 애쓰지 말자.
당장 해결 할 수 없는 것들을 오늘의 걱정으로 가져오지 말고,
작더라도 매일 해야 할 것들을 정해서 단 1시간이라도 할애하여 나 스스로를 미워하지 말게 하자.
너무 많은 것들을 한번에 하지 말고, 한번에 평가하지도 말고, 담담하게 살아내자.
마음을 외로워 말고, 잘 달래서 살아가자.
2023.12.17_빛과 나무
빛과 나무가 이렇게나 큰 효과를 발휘 할 줄은 몰랐다. 이전의 집에서 어떻게 지냈는 지 모를 정도로 많은 것들이 안정적이다. 물론 해결해야 할 일을 해결하지 못한 스트레스는 여전히 있지만 온 힘을 쥐어짜는 긴장감은 많이 풀렸다. 이전 집은 31층이었고, 그 높은 베란다에 서 있으면 자주 떨어지는 상상을 했었다. 그냥 꼭 그렇게 될 것만 같은 높이라 마음이 고달팠고, 해가 들지않아 축축한 공기와 기운에 감싸지는 듯했다. 지금 이 공간주는 행복한 감정이 감사하면서도 대신 무언갈 빼앗아 가진 않을지 불안하기도 하다. 애초에 이것을 행복이라 생각하지 않으면 어떨까. 존재하는 어떤 것 그 자체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감사하게도 그 공간에 내가 들어와 향유 할 수 있다는 것.
이슬아작가의 '일간 이슬아 수필집' 에서 읽었던 구절이 떠오른다.
'내 어리석음으로부터 나를 지켜달라고'
내가 원하는 모습의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큰 결정을 앞두고 내리는 선택보다 매일 찾아오는 작은 선택의 순간에 작은 용기를 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는 것 같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 왔지만 새로 맞이한 한 해도 부디 용맹하게 내 길을 위한 선택을 하길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