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과 7월

짧은 생각 모음

by 현현

독일 | April, 2022

의도치 않게 지난 추억들이 툭툭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다. 길을 걷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휴대폰을 보다가도 아무런 개연성 없이 어느 때의 시간들이 떠오른다. 잠시 가만히 생각에 잠긴다. 최근 자주 떠오른 장면은 독일에서 지낸 4개월간의 시간들이다. 하나의 이미지로 시작한 장면은 햇볕, 냄새, 사람들의 얼굴 같은 것들로 덩어리 져 한꺼번에 몰려온다. 사실 독일에서의 생활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준비가 많이 부족했던 탓이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준비해 온 계획이 아니라 문득 떠오른 생각에 이것저것 찾아보곤 떠날 준비를 하려니 당연히 자본은 부족했고 욕심은 컸다. 그런 과정은 한편으론 나를 용감하게 만들었고, 다르게는 무모하게 만들었다. 그때가 스무다섯 살이었는데, 이십 대 후반쯤에는 그 여정을 계획도 철학도 없는 잘못된 용기의 예로 삼으며 살았다. 그러다 시간이 좀 더 흐르니 각박한 현실에 비해 너무 많은 꿈을 품어 어쩔 도리가 없었을 그 떄의 나를 이해하게 되고, 그렇게라도 떠나 본 경험이 다행이고, 자랑스럽게 여겨졌다. 어쩌면 지금 이 시기가 그때처럼 먼 길을 떠나와 하루하루 설레면서도 매일 마주하는 낯설고 어려운 것들 사이에 내가 누울 자리 어디 없나 조심스레 두리번거리던 것이 꼭 닮아 자주 떠오르는 건가 싶다. 독일의 추억으로부터 시간이 꽤 흘렀지만 나는 그때와 별 다름이 없는 것 같아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안도가 되기도 한다.


아주 외로운 어느 밤 | July, 2023

글을 뱉고 싶은데 머리가 아주 멈추어서 막막하다. 마음이 외로운 밤이면 서울에서 늘 타고 다니던 밤 버스의 창밖 풍경을 자주 떠올린다. 내가 보았던 불빛들은 실제로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내 기억 속의 빛들은 창문에 손가락으로 쓱 문질러낸 듯 희뿌옇고, 제각기 일렁인다. 팔꿈치를 창틀에 걸치고 한 손에 턱을 괴고는 매일 지나다니는 길을 여행자처럼 낭만스레 상념에 젖거나, 어제와 다름은 없는 지 골똘히 들여다 보곤 했는데, 아쉽지만 여기 호주는 약간은 로맨틱했던 그런 불빛이 없다. 불빛을 만들어 내던 촌스러운 간판과 네온사인들, 그 못난 얼굴에 정이 들었나 보다. 정은 그런 것에 드는 건가 보다.


사랑에 관하여 | July, 2024

'엄마, 단둘이 여행 갈래?'라는 프로그램의 클립을 잠시 보곤 하루 만에 전편을 다 보게 되었다. 엄마가 딸에게 30년 만에 오징엇국을 끓여주게 되었는데, 딸은 맛을 보곤 많은 감정들이 올라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에 딸은 방에 들어가 감정을 추슬렀고, 클리셰와 달리 엄마는 그 모습을 보고도 뒤따라가 토닥여주지 않았다. 대신 묵묵히 국을 마저 끓여냈다. 보통 미디어에서 나오는 이상적인 장면이라면 엄마가 슬퍼하는 딸을 따라가 위로해 주고 서로가 멀었던 지난 시간들에 대해 용서를 구하며 화해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를 하기 마련인데, 이 장면 속의 엄마는 그러지 못했다. 너무 미안해서 쉬운 위로조차, 용서조차 구할 수 없는 능청스럽지도 유연하지도 못한 옛날 사람의 속상한 뒷모습이 나는 너무 슬펐다. 무엇도 쉽사리 할 수 없어서 무엇도 하지 못하고는 묵묵히 기다리는 그 마음이 보여 잊힌 생각들이 떠올랐다.


파프리카 | April 2025

전날은 하루가 고통스럽더니 오늘은 평온하다. 카페를 가는 것이 사치스럽고,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 거길 시간을 들여 버스를 타고, 돈을 쓰나 싶어 포기하려다 이유가 대단히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 하며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섰다. 스카에서 한 시간 반정도 책을 들여다보고 나왔더니 그나마 죄책감이 덜하긴 하다. 누구도 내 일상을 평가하지 않는데 나는 정말 끊임없이 스스로 하루를 평가하고 보상과 벌을 주려고 한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태도이기는 하겠지만, 그렇다는 이유로 너무 가혹하다. 나 스스로에게 완전히 투정도 핑계도 허락되는 곳이 있을지.

카페에 왔더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120퍼센트 확신했다. 카페에 손님들이 꽉 차 있어 어수선하기도 했고, 내게 배정될 겨우 남은 한 자리가 협소하긴 했지만, 책으로 온통 둘러싸여 있는 이 공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책들은 독립서적들이 대부분이었다. 설명을 읽어도 이해가 잘 안 되는 목적의 책도 있었고, 낙서 같은 종이 묶음을 파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좋았다. 미완성된 열정은 언제나 신선하고, 그것을 탐닉하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대화를 나눈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정의인지 끊임없이 혼란스럽고,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세상이지만 그런 구분이 필요 없는 것을 보는 일은 마음평안에 큰 도움이 된다. 네 편짜리 짧은 에세이가 담긴 독립 매거진을 읽었는데, 호주에서 개인적으로 발행해서 배포하는 것도 즐거운 경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히 쉬었으면 문밖을 나서는 게 맞긴 하겠구나. 카페에서 일어나면 세라믹 공방에 가서 상담을 할 예정이고, 또 새로운 취미가 생길 예정이다.

작가의 이전글백세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