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빵행 800원짜리 기차를 타고 가는 중입니다. 가격에 걸맞게 에어컨은 없으며, 창문은 아주 크고, 속도는 패딩을 입고 있다면 뛰어내려도 크게 다치지는 않을 것 같은 수준입니다. 인테리어는 전체적으로 옥색입니다. 천장과 벽은 옅은 에메랄드, 쇼파는 조금 짙은 색바랜 녹색에 가깝습니다. 날이 맑아 창문을 열어 놓을 수 있어 좋습니다. 햇살의 색은 밝고 연한 노란색을 띱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햇살색입니다. 아주 맑고 구름이 적당한 날, 따뜻하면서도 나른하게 하는 색입니다. 늦 여름 3-4시쯤의 색이라고 기억합니다. 시간이 지나 이 글을 읽어도 지금처럼 생생하게 느껴질까요.
에어컨이 있었으면 좋지 않을까 쇼파가 좀 더 편하면 어땠을 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돌아오지 않을 이 시간을 그런 생각으로 낭비하지 않게 마음을 바로 잡아봅니다. 사실 더운 것만 뺀다면 스위스의 융프라우 기차와 비슷하기도 합니다. 중간 정차역마다 어찌 그렇게 이쁠 수가 있을까요. 한국은 소박한 멋이있는데, 이곳은 조금 화려합니다. 그렇지만 자연과 어우러지고, 응당 마땅해 보이는 모습으로 알맞은 곳에 알맞게 존재합니다. 한 정차역에서 기차가 출발을 시작했고 나는 창밖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한 소년이 언덕에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나는 그를 보았고, 그는 나를 향해 카메라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기차가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동안 우리는 오래 마주 보았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어딘가에서 내가 담긴 사진을 볼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제 삶이 아주 죽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도 그 사람도 이 땅에 같이 살고 있습니다.
기차는 숲 속을 아주 천천히 지나갑니다. 목적지가 뚜렷한 여행은 편하기는 하지만 지치게 만들기도 합니다. 행여나 길을 잃을 것은 아닌지, 놓쳐버린 것이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가는 길이 그렇게 힘들 수가 없습니다. 물론 목적지가 더할나위없이 훌륭해서 지난 고난을 깨끗하게 잊게 해주기도 합니다. 여행은 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과 닮아있습니다. 목적지가 있다는 것이 피곤하게만 느껴져 그저 뚜벅뚜벅걷다가 길목의 꽃과 나무, 그리고 가끔 튀어나오는 소를 보며 행복해 하지만 그렇게 홀린듯 가다 이 곳이 어디인지 몰라 애초에 있지도 않을 목적지를 더듬더듬 찾아봅니다.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어딘가를 손에 쥐고 가야하는 건지 이렇게 걸어도 되는 것인지. 조그만 더 잘 살다 가고싶은 데 그러기엔 삶이 너무 짧게만 느껴집니다. 이 여행도 분명히 짧을 것입니다. 삶도 이리 짧은 데 여행이 감히 길 수가 있겠어요. 오늘도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아직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찾을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좀 더 미뤄보겠습니다.
제게 주어진 이 두시간 반을 감사히 여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