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엄마를 위한 글쓰기 30일

bog man 그리고

#9 엄마를 위한 글쓰기 30일

#작가고선영 #엄마를위한글쓰기30일 #9


  썼던 내용을 지웠다.
책방에 오자마자 어제 ‘마음 북클럽’ 멤버가 사 왔던 빵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집에서 밥을 먹지 않고 왔다. 오는 길에 땅콩버터를 하나 샀다. 그리고 마시는 요거트도 하나 샀는데 계산하려고 하자 1+1이라고 하나를 더 가져오란다. 1+1은 세계 어디에나 있을까를 살짝 생각하다가 계산을 마치고 책방에 왔다.

  아침에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하다.
갑자기 컨디션이 별로인 것도 힘이 든다. 아이들 클래스 개설을 위해 시간을 정하는 통화를 했다. 클래스가 늘었다. 이제 코로나도 끝나가는 것 같다. 매스컴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그렇지만 체감은 그래도 많이 좋아지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엄마를 힘들어하는 이유는 엄마를 떠올리면 우울해서인 것 같다. 우울한 옛날이 자꾸 떠올라서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 같기도 하다. 엄마의 삶은 우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건 모두의 삶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은 찰리 채플린에게 해당된다. 우리의 삶을 다 쪼개어 보면 그 안에 희극과 비극과 온갖 잡다한 것이 섞여 있다. 엄마가 우울해 보인다는 것도 어쩌면 나의 편견이다.

  오늘은 솔직히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피곤하다. 그냥 웃기는 이야기나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 선택은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써야 한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기에 더욱더 써야 한다. 자, 자……. 엄마의 유머러스한 점을 떠올려보자. 우리 엄마는 갑자기 뜬금없는 애교를 부린다. 콧소리를 내면서 우리에게 그러거나 또는 아빠한테 그런다. 하도 생뚱맞아서 웃은 적이 몇 번 있다. 엄마의 유머……. 와 어쩜 이렇게 생각이 하나도 나질 않냐. 진짜 기가 막히다. 엄마의 재밌는 점……. 오늘은 어쩔 수 없다. 다른 내용을 써야겠다.

  내가 우리 엄마한테서 좋아하는 건 엄마의 은은한 살 냄새다. 그 냄새는 비가 올 때 더욱 증폭되는데 엄마만의 농도를 가진 냄새가 있다. 이건 뭔가 만들어 낸 냄새가 아니다. 나는 비 올 때 그 냄새를 맡으면 잠이 솔솔 온다. 언젠가 이런 적이 있었다. 지하철을 탔던 날이다. 밖에는 비가 왔는지 안 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탄 열차 칸 안에서 엄마 냄새와 아주 조금 다르지만 거의 흡사한 냄새를 발견했다. 나는 코를 킁킁거리면서 엄마의 냄새를 찾았다. 누가 보면 진짜 이상하다고 했겠지만 최대한 콧구멍을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면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다가 한 아저씨를 발견했는데 엄마보다 마르고 안경을 쓴 까만 피부를 가진 어른이었다. 그 뒤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이 사람은 어떻게 엄마랑 비슷한 살 냄새를 가졌지?’

  나는 꽤나 그 사람을 관찰했다. 아 쓰다 보니 생각이 난다. 그 사람이 물방울이 맺힌 우산을 손으로 들고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나는 엄마의 살 냄새를 좋아한다. 지금도 향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이 엄마의 살 냄새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엄마의 젖을 만졌다. 엄마가 설거지를 할 때면 뒤에서 엄마의 젖을 만졌다. 엄마와 나의 가슴이 비슷해졌을 무렵부터는 전혀 만질 생각을 안 했다. 엄마의 살 냄새도 좋아는 하지만 내가 엄마에게 킁킁 거리는 일은 없어졌다.

  사람에게 고유의 살 냄새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어제 오랜만에 내가 좋아하는 내셔널지오그래픽 책을 봤다. 12년 전에 영어 과외를 받겠다고 아는 동생 사촌을 소개받았다. 캘리포니아에서 온 나 보다 어린 남자 애였는데 얼마나 혀가 굴러가는지 애초에 포기를 해버렸다. 그 책을 열어서 하나하나 펼치다 보니 영국에서 발견된 Bog man(결박당한 남자) 미라가 나왔다. 미라인데 얼굴 피부의 결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잘 보관된 상태였다. 순간 그 미라에서도 특유의 살 냄새가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이 꽉꽉 졸라매어진 미라.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나의 생각은 언제나 무계획적으로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