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화
#11 엄마를 위한 글쓰기 30일
#작가고선영 #엄마를위한글쓰기30일 #11
책방을 좀 정리해야 하는데 나는 지금 최대한 또 미루고 있다.
귀찮다. 컨디션이 별로라는 핑계를 대고 아직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위로를 한다.
방금 유튜브 촬영을 했다. 촬영이라고 말하면 좀 거창하지만 그냥 셀카봉 삼각대에 핸드폰을 거치하고 마이크만 하나 연결해서 바로 영상을 찍는다. 콘티도 없다. 그냥 내 얼굴이랑 좀 친해질 요량으로 시작한 일이다. 모든 일을 일사천리로 한다. 일사천리로 하면 퀄리티가 개떡일 것 같지만 실제로 나의 경우는 계속 발전한다. 물론 실수도 많다. 그렇지만 그건 어차피 겪어야 할 과정인 것이다.
영상을 찍으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자주 사용하는 말을 말이다. 내가 자주 사용하는 말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사실’과 ‘솔직히’라는 말을 많이 쓴다. 어떨 때는 그 말을 너무 반복해서 영상을 다시 찍은 적도 있다. 그리고 아직도 완전히 고쳐지지 않은 버릇 하나가 있는데 침을 너무 꿀떡 삼키는 것이다. 이걸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나는 어쩌면 되게 솔직하거나 사실과 무관한 사람인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요즘의 나는 늘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람들이 반복해서 말하는 건 ‘그런 사람이라서가 아니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라고 말이다. 사람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엄마가 반복적으로 말하는 말은? “굉장히” 다. 굉장하고 싶은 걸까? 오늘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빠를 관찰하지 않는다. 아빠는 더 이상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직도 가끔은 속을 뒤집는다. 나 때문이 아니고 엄마한테 하는 태도 때문에 내 속을 뒤집는다. 그래도 나에게 직접적으로 자극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엄마는 아니다. 엄마는 계속 나를 자극한다. 그래서 엄마와 직면하려고 하는 거다. 엄마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내가 아무래도 엄마한테 집착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슬며시 머리를 든다.
오늘은 아빠와 엄마의 후각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집에서 똥 냄새가 진동했다. 왜 이러지 했더니 아빠가 들여놓은 커다란 화분에 음식물 쓰레기를 줬단다. 참 기가 막히다. 그럼 얼마나 벌레가 꼬이겠냐. 나는 부아가 치미는 걸 꾹 참았다. 그게 화를 낼 일은 아니다. 엄마, 아빠는 예전 같지 않다. 온 집안에 진동하는 똥 냄새를 나만 느끼는 거다. 그 사실에 화가 난다. 그리고 조금은 불안한 마음도 든다. 엄마 아빠가 점점 저무는 거다. 그걸 바라보니 딱 떨어지는 감정이 아닌 복잡 미묘한 감정이다. 내 방을 생각하면 이런 말 할 자격은 없다. 나는 언제나 막 쌓아둔다. 정리는 언제나 최대한 미룬다. 그러나 내가 속한 공간이 나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벌써 많이 경험했다. 더 이상은 미루면 안 된다.
어제저녁 독서모임 월글에 오랜만에 학님이 왔다. 다들 이 모임에 정이 많이 있어서인지 어딜 가면 뭘 그리도 사 온다. 용님은 용산에 새로 생긴 숲처럼 거대한 백화점(정확한 명칭을 모름. 또 알려는 노력할 생각 없음)에서 처음 보는 디저트를 사 왔다. 레몬 크림이 들어간 이태리 도넛과 빼빼로. 빼빼로에는 치즈맛이 가미된 초콜릿이 발려져 있었는데 용님 말에 의하면 “고급진 빼빼로”라고 했다. 패스츄리로 된 맛있는 디저트와 학님이 사 온 쿠키로 우리는 책을 보면서 눈과 입이 즐거웠다. 미각과 후각을 떠올리니 어제의 일이 떠오르고 엄마 아빠의 간도 떠오른다. 몸속 간이 아니고 맛 ‘간’ 말이다. 이제 엄청 세졌다. 얼마 전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가 떡볶이에 설탕을 몇 숟가락이고 부었다던 지인의 말이 떠오른다. 미세 감각이 둔화되는 것인가 보다.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한다. 방금 핸드폰 용량이 없대서 많이 정리를 했다. 그것처럼 인간도 계속 업데이트되거나 ‘초기화’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
초기화된 나를 상상한다. 오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