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영성장에세이
한 번도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하혈이라니. 엄마가 전화를 했다. 언제나처럼 용건의 답만 듣고 내가 말하는 중에 끊었다. 물론 살면서 하혈을 한 번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이렇게 한 달여 동안 하혈을 한 적은 없다. 좀 놀랐지만, 놀라움 보다는 짜증이 난다. 놀고 싶고, 일하고 싶고(진심이다), 해야 할 것이 이토록 많은데 이 시점에 하혈이라니. 엄마는 며칠째 나에게 미역국을 준다. 애라도 낳은 것처럼 말이다.
병원에서 지난주와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이래서 다른 병원도 가봐야 하는 건가. 지난주 당황한 나머지 아무 것도 물어보지 못했던 것과 다르게 오늘은 정신을 차렸다. 내 자궁에 대한 궁금증을 조목조목 물어보았다. 난소와 난자, 자궁, 질 정도의 지식 밖에 없었다. 어이없고 당황스럽다. 내 인생 그래프를 그리는데 누가 갑자기 밀쳐서 선이 밖으로 홱 그어진 기분이랄까. 그 마당에도 ‘이건 글감이야’라고 생각했으니 약간 병적인 구석이 있나 싶다.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만 그래도 그렇지.
오늘 병원에서 초음파로 검사한 내 자궁을 봤다. 성인 남성의 주먹 크기만큼 부어있다고 했다. 처음 들었을 때 그 크기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정상의 두 배라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렇게 작은 속에 내내 내가 담겼었다는 사실이 이질적인 금속과 맞닿은 것처럼 느껴졌다. 한 때 내 집이었다. 그 속에서 엄마가 나를 열 달 품었다니 엄마는 매 순간 나를 느꼈을까?
엄마와 나를 한 개체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난주 산부인과에 갔을 때부터 나는 엄마와 따로 가 아니었다는 것을 생각한다. 엄마와 나는 하나였다. 이상한 기분이다. 나는 내 자궁에 누군가를 품어본 적이 없다. 그 일은 어쩌면 이번 생에는 경험하지 못할 일인지도 모른다. 계획이 없고 시간이 많이 흘렀다. 누군가를 품는다는 것의 가장 원초적이고 궁극적인 것이 엄마가 되는 일일까? 나는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일에 대해 잠깐 상상해 본다.
나라는 실체가 엄마의 배 속에서 자란다. 어떤 영상에서 봤는데 손가락이 투명했다가 점점 불투명해졌다. 투명했던 내 몸에 피가 돌고, 세포가 돌고, 조직이 단단해지고…. ‘투명한 나’를 처음 상상한 것은 아니다. 예전 나의 꿈에서도 강렬하게 나왔다. 투명한 나. 책방에서 한없이 흐느적거리고 투명해지는 나. 흘러서 컵에 담기고 테이블 위에서 바닥으로 책장에서 아래 책으로 줄줄 흘러내리는 나. 엄마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내가 엄마와 하나였을 때 내가 자라는 그날그날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두렵고, 걱정되고, 기쁘고, 화나고, 억울하고, 슬프고, 짜증나고, 힘들고 온갖 생각을 했겠지. 그런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와 하나였던 시간.
몸에 아주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몹시 춥고 졸리다. 이러다가 내 몸에 피가 남아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아, 놀러 가야 하는데….’ 생각하는 게 나라서 좀 피식 웃게 된다.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좀 기가 막히고 또 황당하다. 오늘의 나는 조금 쪼그라들어 있다. 그 이유를 시시콜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다.
엄마가 요즘 아침에 나를 깨울 때 이렇게 부른다. “아기야~ 일어나. 밥 먹자.”, “사랑하는 우리 딸, 밥 먹자.” 그런데 나는 이런 소리를 들으면 굳는다. 이건 나한테 문제가 있는 것일까? 그런 말이 낯설고 불편하다. 엄마가 아기라고 부르는 것도 불편하고, 사랑하는 우리 딸이라고 하는 것도 불편하다. 왜 그런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우리의 마음을 정확하게 매 순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엄마의 온도 차이 때문인 것 같다. 찾아보면 나에게 수많은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엄마가 어떤 때는 기분이 좋은 것 같고 (이런 적은 그렇게 많지 않다) 어떤 때는 눈물을 주룩주룩 쏟아내는데 그 두 모습의 간극이 너무 크다. 그게 나를 굳게 만든다. 엄마의 기분을 종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빨강머리 앤 만화를 보면서 엉엉 울어버리는 우리 엄마를 나는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나는 방패 대신에 가면을 선택한다. 엄마의 어떤 감정에도 무대응으로 일관한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스스로를 세팅한 것 같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야겠다. 나는 엄마에 대한 나의 마음과 마지막으로 씨름을 좀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솔직히…. 처음 이 책을 계획했을 때는 ‘엄마를 위해 쓴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엄마를 위한다는 건 핑계다. 나흘이 되자 내 마음을 속일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엄마가 그냥 나를 ‘나’로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다. 자, 묻자. ‘너는 그럼 엄마를 ‘엄마’로 받아 들이냐? 이건 공격이잖아. 내가 지금 싸우자고 한 말이 아닌데….’
둘의 맹렬한 대화가 시작된다. 내 머릿속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다. 내 이름은 고선영이고 이 대화를 끊임없이 던지는 사람은 ‘저선영’이다. 언젠가 비밀친구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해서 내가 지은 이름이다. (고기압, 저기압에서 따왔다) 그냥 덮어두면 어느새 조용해진다.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닐 땐 나름의 방법을 터득하기 마련이다. 우리 엄마에 대한 나의 마음은 대체 뭘까? 때때로 이런 상상을 한다. 인간이 무성생식을 하던, 공장에서 한꺼번에 길러지든, 그렇게 태어나고 자란다면 우리가 뉴스에서 보는 많은 문제 중 절반 이상이 없어지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인간의 혈연이라는 것이 좀 무섭다. 내 머리에 붙은 껌처럼. 오래 눌린 스티커처럼 한 번도 단숨에 해결되지 않은 기분…. 뭔가 갑갑하고 끈적거리는 그 느낌.
그게 내가 가족을 보는 마음이다. 그런데 이건 왜곡되어 있거나 너무 치우쳐 있을 수 있다. 방금 언니가 책방 월세를 보내줬다. 지난달은 다른 언니가 월세를 보내줬다. 참 이렇게 가족의 덕을 보는 마당에 이따위 글을 쓰고 있다니. 진짜 나는 시베리안 허스키다. (찰 지게 욕하던 때에서 지금은 벗어났지만 그래도 욕을 하고 싶을 때 가끔 쓴다. 전 세계의 시베리안 허스키 반려인들이여 미안합니다) 이제 다시 나에게 질문이다. 집요한 나다. 너에게 엄마는 무엇이냐?
나는 엄마가 불편하다. 엄마를 좋아했던 때가 언제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엄마는 끊임없이 표면적으로 나에게 잘 대해줬는데 나는 끝끝내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엄마의 언어와 행동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 아 답이 나온다. 따로 살아야 한다. 지금 부모님께 기대어 사는 내가 문제다. 이렇게 결론을 내면 독립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한심하다. 이런 질문과 결론으로 나는 성장할 수 없다.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없다.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이 질문과 답에서 끝나면 안 된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가족이라도 각 개인이 존중되는 그런 가족관계를 원한다.
가족관계.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엄마와 나를 본다. 관계가 더 보송보송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잘못된 걸까. 엄마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전 생애에 아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속에서 자란 사람이다. 영혼을 달래줄 진정한 대화를 우리 엄마가 경험하길 원한다. 그러나 엄마는 신앙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해결될 일이라면 벌써 해결되었을 것으로 보는 나와는 생각이 다르다. 엄마가 좀 마음이 편해졌으면 좋겠는데 엄마는 아직 전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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